에게

  2018시즌 개막전, 기아타이거즈가 KT위즈에게 패했다.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1회말, 1사 만루에서 시즌 100타점을 목표로 세운 나지완의 안타로 2점을 손쉽게 뽑았다. 후속타가 터지지 않은 게 아쉬웠지만 야구란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3회초, KT의 신인 강백호가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고졸 신인이 개막전 라인업에 들고 거기에 강렬한 홈런까지 날렸다. 이번 시즌 KT를 향한 전문가들의 예측이 모조리 빗나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고작해야 신인 한 명이 들어온 거지만 (강백호에게는 이런 수식이 좀 미안하지만) 그 한 명의 가세가 KT에 어떤 시너지를 불러올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지 않은가.

 

  홈런 하나, 고작해야 한 점이었지만 오늘 경기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기분 탓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헥터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6회초 로하스의 홈런, 그리고 이어진 윤석민과 황재균의 안타로 3:2가 되었다. 그리고 또 박경수의 1타점 적시타. 고작해야 한 점일 뿐인 신인의 홈런이 6회초 챔피언스필드를 뒤흔드는 광풍을 불러온 것이다. 6회말 공격에서 김주찬의 희생플라이와 버나디나의 안타로 동점을 만들었지만, 1회말처럼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KT가 먼저 앞서나가고 기아가 뒤쫓아가는 그림이 영 석연치 않았다. 동점이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게 아니라, 역전을 시키지 못해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7회초 또다시 로하스의 홈런이 터졌다. 그리고 경기는 그대로 끝이 났다.

 

  기아타이거즈의 1패였고 KT위즈의 1승이었다.

  이제 고작 한 경기를 치렀을 뿐이지만, 각각의 1패와 1승이 두 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일 두 팀은 각각 1패와 1승의 무게를 안고 두 번째 경기를 치른다. 어쨌든 144란 숫자는 144번의 '1'들로써 만들어진다.

 

  * 헥터가 아쉽긴 했지만, 임창용과 김세현은 건재했다. 2이닝 가까이 던진 김윤동도 나쁘지 않았으나 시즌 초반에는 그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열두 개의 안타로 4득점밖에 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타격의 흐름이 아쉬웠다.  나지완은 아주 훌륭했다.

 

  * 양원경, 김종모 님의 '말로홈런'을 청취하며 응원문자를 보냈는데, 나의 응원이 소개됐다. 야구공을 보내준다고 한다. 개꿀.  

 

 

 

 

   [패터슨]은 패터슨에서 벌어지는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의 이야기다. - 나도 해리에서 벌어지는 ‘해리’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 그러나 [패터슨]에서는 어떤 '벌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이 미미하다.

  영화가 얼마나 잔잔하게 흘러가느냐면 버스회사 동료 도니가 겪고 있는 가정사가, 그가 늘어놓는 푸념이 영화에서 도드라져 보일 정도이다. 패터슨이 자주 가는 바에서 에버렛이라는 남자가 변심한 애인 마리 때문에 가짜 총으로 자살소동을 벌이는 씬은 이 영화에서 가장 상업적인(?) 씬이다.

  패터슨이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와 함께 사는 집은 요동치는 삶으로부터 한발 비껴서 있는 것 같지만, 정말 패터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패터슨은 시를 쓴다. - 그것만으로 얼마나 무지막지한 사건인가? - 아침 일찍 일어나 잠든 로라에게 입맞추고, 로라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 혼자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한다. 운행을 나가기 전까지 자신의 비밀노트에 시를 끼적인다. 패터슨의 시는 그의 쓰는 행위로 소환되었다가 내레이션으로 전사된다. 그의 일과는 시와 함께 흐른다. 너무나 평온하게. 그게 패터슨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라고 말했지만 화요일이나 수요일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시간은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다.)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패터슨이 집에 돌아왔는데, 집 앞, 우편함 기둥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패터슨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바로세운다.

  [패터슨]은 '균형'과 '불균형(기울어짐)'의 사이에 있는 이야기다.

  패터슨의 드러나지 않은 고민과 갈등은 그의 시 속에서 정제되고 질서를 갖추게 된다. 파문이 이는 물 위에 있지만, 그 중심에는 시심이라는 깊이가 있어 흔들림은 최소화되고 심지어는 무화된다.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난 것 같지 않은.

 

 

  컨트리가수를 꿈꾸는 로라가 몇백 달러를 호가하는 기타를 구매한다고 했을 때 패터슨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과 망설임이 어린다. 그러나 이내 로라의 뜻을 존중해준다. 로라가 집 내부를 단장하는 동안 조금씩 바뀌는 집안의 분위기와 패터슨의 얼굴이 교차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물리적으로 일어난 변화들로부터 패터슨은 침잠해 들어가길 원한다. (패터슨이 시를 쓰기 위해 지하방으로 가는 것을 보면, 가장 균형 잡힌 것처럼 보이는 삶의 형태가 어쩌면 가장 불균형해 보이기도 한다.)

  세 번째로 우편함 기둥이 기울어졌을 때, 패터슨은 화를 내는 것 같다. 그런데 화를 내는 대상이 꼭 패터슨 자신인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 패터슨이 아닌, 시를 쓰는 패터슨을 향한 분노이다. 그 순간 패터슨의 심정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더 이상의 평정은 어려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우편함 기둥을 다시 바르게 세운다. (우편함 기둥을 기울게 한 범인이 패터슨 부부가 기르는 애완견 '마빈'이었다는 것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패터슨이 갖고 있는 시에 대한 결벽을 나도 예전에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밤을 새워 다듬은 시를 가지고 우체국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던 기억은 여전히 불구의 몸으로 찾아와 시를 쓰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곤 또 우는 얼굴로 제발 시를 써달라고 애원한다.

  패터슨이 복사본을 만들어두라는 로라의 말을 듣고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자신의 시를 스스로 시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그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에게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로라가 패터슨에게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어렵다.

  로라와 함께 저녁을 먹고 돌아온 후, 패터슨은 마빈이 찢어놓은 자신의 비밀노트를 보며 절망에 빠진다. 로라 또한 마빈을 저주하며 집 밖으로 내쫓아버린다. 그 순간 패터슨이나 로라보다 더 절망한 건 나였다. 노트에 쓰인 시들을 절대로 다시 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패터슨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쓰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동요도 없는 지극히 평온한 삶을 얻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홀로 앉아 있는 벤치는 왠지 잔뜩 기울어져 보였다. 더치앵글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벤치 끝에서 엄청난 기울기를 견디고 있는 패터슨의 뒷모습을, 나 역시 아슬아슬하게 견뎠다.

 

  그 때 한쪽으로 기울어진 프레임의 반대쪽을 디디며 들어오는 한 일본인 남자(나가세 마사토시)가 있다. 그 남자가 패터슨에게 건넨 것은 노트이다. 남자는 노트를 건네고 홀연히 사라지지만, 패터슨은 어느새 삶의 균형을 되찾는다. 시로 인해 또다시 불균형의 세계를 만나겠지만, 그 때의 기울어짐은 한쪽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다른 한쪽에서도 역시 새로운 균형을 향해, 그리고 다시 어떤 기울어짐을 향해 끝없이 몸을 흔드는 무게가 있는 것이다.

 

  * 아담 드라이버를 비롯한 배우들은 카메라가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연기를 소화한 느낌이다. 짐 자무쉬 감독의 디렉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프레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천국보다 낯선]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뭐, 그냥 느낌이지만.  

 

  [1987]에서 프레임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캐릭터를 ‘박 처장(김윤석)’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1987]은 그의 시점에 매몰돼 있는 영화가 아니다. [1987]의 풍광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이 그랬듯 그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견딘 다양한 군상들의 시점에 의해 재현된다. 대개의 영화에서 감독들이 특정 캐릭터에 자신의 시선이나 가치를 고스란히 투영시키는 것은 영화의 보편적인 문법이다. 그러나 장준환 감독은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시대의 욕망을 택했다. 그 욕망을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장치가 바로 다양한 시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가라는 신념을 받들던 ‘조 반장(박희순)’이 자신에게 국가나 다름없던 ‘박 처장’의 진짜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두려움 가득한 눈빛은 실제로 그런 순간을 경험한 자의 동체를 이식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 만큼 처참했다.

 

  프레임에서 최소화되거나 은폐되었던 ‘안 계장(최광일)’의 시선은 어두운 밀실에서 이부영(김의성)에게 접견 기록을 건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데, 그 시선은 다른 캐릭터들이 지닌 그것의 무게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조카의 부검 장면을 내려다보는 삼촌(조우진)의 시선이나 박종철 열사(여진구)와 함께 내러티브의 수미에서 협응을 이루고 있는 이한열 열사(강동원)가 혼돈의 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마 마주볼 수가 없었다.

  장준환 감독이 여러 군상들의 시선을 프레임 안으로 끌고 들어온 것은 그 시대에 대한 최대한의 객관적 상(狀)을 제시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프닝시퀀스, 남영동 대공분실 탁자에 놓여 있는 안경에 비치는 상이라든가(그 때의 안경은 처참한 고문 현장을 어떤 누락과 은폐도 없이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렌즈가 될 것이다.), ‘공안부장(하정우)’의 차내 룸미러에 비친 상(윤상삼 기자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 기록이 담긴 박스가 비쳤던 것 같다.), 또는 ‘연희(김태리)’와 이한열 열사를 동시에 비춘, 신발가게의 거울도 기억에 남는다. 전투경찰의 군홧발과 몽둥이, 그리고 눈을 뜰 수조차 없는 최루 가스를 피해 들어선 신발가게의 거울에, 너무나 순수해서 어떻게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아름다움이 그 아름다움 그대로 거울에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안경이나 거울 등은 감독이 작심하고 거둬들인 카메라를 대신하여 영화 속의 또다른 렌즈로 작동한다.

  인간의 어떤 몸짓이나 인간과 관계된 어떤 현상이 객관적으로 떠오르기 위해선 그것이 맺히는 렌즈(거울이나 유리)가 투명한 것이거나, 적어도 그 렌즈 앞에 선 것을 바로 비출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박 처장’은 ‘조 반장’에게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자신 또한 공작의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때 ‘박 처장’은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본다. 그 액자는 투명한 것이 아니다. 액자 안에 들어있는 얼굴 때문이다. 카메라가 패닝되면서 ‘박 처장’의 얼굴이 마치 유리면을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상은 그래서 시대에 투지했던 ‘박 처장’의 순수하거나 객관적인 상이 될 수 없다. 유리면에는 몰락의 순간에도 자신의 모습과 행위들을 왜곡시켜야 겨우 직립할 수 있는(인간 흉내를 낼 수 있는) 추악한 몸체만 있을 뿐이다.

 

* 영화에서는 빈번하게 등장하지 않지만, ‘김정남(설경구)’은 그가 노출되지 않는 프레임 바깥에서 내러티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 자체로 거대한 미장센이 되는 인물인 것 같다.

 

* 그가 교회 외벽에 매달려 있다가 미끄러져 전선을 겨우 붙잡고 있는 씬이 있다. 그 때 교회 안에 있던 ‘박 처장’이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그의 그림자를 본다. 그의 실루엣이 유리창의 덧씌워진 예수의 형상과 겹쳐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뭔가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 씬 하나로 장준환 감독의 모든 영화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영화를 다시 한번 더 보고 [1987]에 대한 더 정교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경계에서 꿈꾸는 것들

  서사는 기본적으로 욕망을 함의한다. 욕망은 인간 본위의 것이고, 세계의 갈등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러시안 소설]에서도 욕망은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동력이다. ‘신효’의 욕망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순수하고 내적인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글쓰기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대타자적인 욕망이 강하다. ‘신효’의 욕망은 소설 본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 바깥에 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반영 행위이다. 즉, 자기자신과 타인과의 거리, 세계적 질서와의 관계를 파악한 이후, 임의의 지점에 자기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문제적 상황에 대한 자신의 대응 방식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결국 글쓰기의 실패에 좌절을 겪는 ‘신효’에 대한 구원은 ‘김기진’이라는 권위의 표상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효’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효’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자기기만적 글쓰기를 계속해 나간다. 그 결과 ‘신효’는 극심한 좌절을 경험한다. ‘재혜’가 건네준 약물을 받아 마신 ‘신효’는 27년이라는 시간 동안 잠을 자게 된다. 삶의 상태도 아니고, 죽음의 상태도 아닌 채로 잠을 자는 동안 ‘신효’가 이루지 못했던 꿈이 이루어진다. ‘신효’가 굉장한 소설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신효’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신효’가 여전히 자기기만의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효’는 영화 속 현실을 살고 있지만, 그 현실이 자신이 쓰지 않은 소설로 만들어진 현실이므로, 주체의 몸은 소거된다. 소거된 몸의 각성은 ‘신효’로 하여금 자기기만이라는 또다른 꿈으로부터의 각몽을 위해 ‘성환’을 찾아나서게 한다.

  한편 문단의 비주류로서 콤플렉스를 안고 있던 ‘경미’는 이민을 통해 자신의 욕망이 결렬된 경계 밖으로 자신의 몸을 최대한 이격시킨다. 몸을 이격(또는 은폐)시킨다는 점에서는 ‘성환’과 비슷하지만 ‘성환’이 ‘신효’의 몸을 빌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신효’가 욕망의 충동을 제어하지 않고 그대로 표출시킨다면, ‘성환’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한다. ‘성환’은 ‘신효’ 작품의 문제점들을 짚어낼 만큼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그것을 자신의 작품을 쓰는 데 할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효’가 새롭게 구상한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한 소설가 아들이 아버지와 비교되는 게 싫어서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의 작품을 개작한다. 아들은 자신이 쓴 이야기가 훨씬 더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아들은 자살하고 아버지의 명성은 더 올라간다.

 

  또한 ‘신효’가 ‘경미’에게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성환’의 특별한 정황이 포착된다. ‘신효’가 유명한 소설가의 아들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하자, ‘경미’는 그것이 ‘성환’의 이야기라는 걸 금방 알아차린다. ‘경미’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므로 그 이야기를 모티프로 소설을 쓰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한다. ‘성환’이 아버지 ‘김기진’의 작품을 대신 썼다는 확언은 영화에서 이뤄지지 않으나, ‘신효’의 소설 내용과, ‘성환’이 후반부에서 ‘신효’의 소설을 개작한 주인공임이 밝혀지는 것으로 그 확언은 대체된다. 그리고 내내 관찰자의 위치에 서 있던 ‘성환’이 후반부에는 서사의 확실한 중심으로 이동하게 된다.

  ‘재혜’는 ‘성환’을 모델로 쓴 ‘신효’의 작품이 마치 그리스비극같다며 감탄한다. 그리스비극에의 비유는 사실 ‘신효’의 소설 면면에 대한 ‘재혜’의 인상평가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리스비극이 함의하는 비극성은 [러시안 소설]의 하중을 견디고 있는 요체이다.

  비극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물리적 고통에 대한 임상적 반응을 초월한 가역 반응을 통찰한다. 그리스비극의 대표작 격인 「오이디푸스왕」에서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바로 자기자신이고, 자신이 어머니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겪게 되는 혼란이 자기부정과 자해 또는 자살로 이어진다. [러시안 소설]의 인물들은 부모가 동반자살하여 죽거나(신효), 어머니가 없거나(성환), 아내를 잃어버렸거나(정석) 어머니가 없고 또 나중에는 아버지마저 잃게 되는(가림) 등 가족 결합이 결렬된 환경에 놓여 있다. ‘성환’의 가족서사가 영화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지만 ‘성환’은 오이디푸스왕처럼 자기부정과 자기연민,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성환’의 아버지를 향한 콤플렉스는 ‘가림’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가림’은 ‘성환’을 느리고 길고 복잡한 러시안소설같다고 표현하는데, 마침 ‘가림’이 ‘성환’에게 빌려가는 것이 러시아 작가의 책이다. 영화에서는 그 책이 무슨 책인지 정확히 설명되지 않지만 ‘성환’의 대사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소설이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다. 「첫사랑」의 주인공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지나이다’가 자신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차에, ‘지나이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단순히 괴로워하거나 아버지를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의 경이로움을 깨닫는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 의식의 발현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경외의 영역의 어떤 감정으로 이동시키고 환치시킴으로써 아버지와의 수직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무의식적 사고행위이다. 그런 ‘블라디미르’와 ‘성환’의 동일시에 대한 암시는 아버지를 향한 복합층위의 감정을 억누르며 아버지와 결합된 가족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표면적으로 ‘성환’이 ‘신효’의 소설을 대신 쓰게 된 동기는, ‘신효’의 욕망에 대한 연민 때문인 것으로 비춰지지만, 그 행위는 ‘신효’라는 타자를 위한 순수한 연민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을 남기고 싶은 ‘성환’의 욕망으로 표현된다. ‘성환’의 그러한 글쓰기도 자기기만으로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성환’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버지는 가족 질서의 표상이자 권위이다. ‘성환’은 부계 권력이 장악하는 가족사회에서 수동적인 태도로 살아온 인물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 ‘성환’의 의식이 그의 내레이션을 통해 소환되는데, 자신에게는 ‘신효’가 갖고 있는 구체적인 욕망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욕망이 결렬되거나 소진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무화된 상태로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효’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신효’의 소설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데 무려 십 년이란 시간을 할애한 ‘성환’은 ‘신효’의 욕망을 경험하고 자기화하고, 완성하기에 이른다. ‘성환’은 자기자신의 이름을 내걸지 않음으로써 아버지와 철저하게 단절된다. 아버지와 단절됨으로써 ‘성환’은 제도 바깥으로 밀려난 이후 그 경계 너머에서 ‘성환’은 어떤 꿈을 꿀 것인가.

 

경계 이후, 말해지는 것들

 

  [조류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확신한 주체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은, ‘한비’가 남긴 메모(나 자신에 대한 확신은 있어요.)를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이 속한 사회 바깥에 귀속된다는 것에 대해 결정적 증언을 할 수 있는 인간에게 사회(가정, 국가, 제도 등)만큼 불분명한 것은 없다. ‘한비’의 운명 앞에 놓인 사회는 ‘한비’에게 별다른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한비’가 자신이 조류로 환태해야 하는 것을 운명으로 인식하고, 그에 따른 고통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의 과거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그때 그 순간, 우리가 아니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보고, 느끼고, 주고받을 수 없었던 것들이니까.

 

  역시 ‘정석’에게 ‘한비’가 남긴 메모인데, ‘한비’의 운명론적 사고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한비’가 비록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 ‘정석’과 공유한 바는 없지만, ‘한비’는 ‘정석’과의 시간을 행복했던 것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조류가 된 이후(조류를 꿈꾸는 시간 이후)’의 삶이 가치 있듯이 ‘아직 인간인 시간’ 또한 가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조류인간]은 의식적으로 운명 앞에 놓인 인물들의 표정과 삶의 양식을 응시한다. ‘정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사실은 자기자신의 운명을 위해) ‘정석’ 앞에 나타난 ‘소연’의 말(찾으려고 찾은 게 아니에요. 만나게 돼서 만난 거예요.)도 같은 차원의 것이다.

  [조류인간]에서는 어떤 의지보다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양태가 강하게 드러난다. 아내가 택한 운명을 확인하기 위해 떠난 ‘정석’의 도정 또한 ‘한비’가 수용했던 자신의 운명만큼이나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동력을 얻은 것이다. ‘정석’이 신발끈을 묶고 있는 모습이 [조류인간]과 [러시안 소설]에서 각각 한 번씩 노출되는데, 그 장면이 바로 ‘정석’ 또한 어떤 경계를 향해 자신의 몸을 끝없이 추동시키는 ‘정석’의 삶과 운명에 관한 미장센이다.

  [프랑스 영화처럼]의 표제작 <프랑스 영화처럼>이 신연식의 전작들을 겨냥해 어떤 메시지를 함의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 영화처럼 살든지, 이태리 연극처럼 살든지 러시안 소설처럼 살든지 그러한 선택의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수민’의 내레이션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기홍’이 있으니 자신은 ‘기홍’에게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운명이라는 것은 시간차를 달리해서 어딘가에서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 인간이 어떤 몸으로 어떤 경계에 서 있든 자신을 이끄는 운명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연식이 말해온 것, 그리고 계속 그로 인해 말해질 것들이 아닐까.

경계의 몸, 노바드 혹은 노 바디(No body)

  신연식이 창조한 많은 인물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육체를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육체를 견디지 못한 인물들은 육체를 버리기도 하고([프랑스영화처럼](2016)의 <타임 투 리브>의 ‘엄마’), 육체를 바꾸기도 한다.([조류인간]의 ‘한비’) 육체를 버리거나 육체를 바꾸려는 인물의 몸은 필연적으로 어떤 경계에 서게 된다. 그 경계에 따라서 몸의 양식이 결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조류인간]의 ‘소연’은 ‘정석’이 ‘한비’를 찾아가는 과정의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다. 그녀는 ‘한비’와 함께 온갖 고행을 견디며 이미 수술을 한번 받고 환태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실패했고, 그 이후 어쩔 수 없이 인간세계에서 살아왔다. ‘소연’은 그 15년의 시간이 지옥같았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으로 보통의 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 ‘소연’에겐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연’의 몸이 인간의 몸도 아니고, 조류의 몸도 아닌, 경계의 몸이기 때문이다. ‘소연’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인간세계 안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경계의 바깥을 꿈꿔왔다. [조류인간]에서 몸은 정신의 부속물로서의 물리적 육체가 아니라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므로 ‘소연’은 인간으로서 현존하는 공간을 부정하고 스스로 방외자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소연’의 절규에 생각을 바꾼 ‘이은호’는 ‘소연’에게 약물을 건네고 ‘소연’은 15년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약물을 받아 마신다. 그리고 ‘정석’이 아내와 대면하는 순간 ‘소연’은 크나큰 고통에 빠져든다. 하지만 '소연'의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마지막 씬에서 ‘소연’은 ‘정석’에게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꿈에서 이룰 수 없는 꿈들이 이뤄져서 꿈인 줄 알았다고 한다. 많은 꿈들이 이뤄진 꿈속에서조차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지각하는 것은 의식의 최종적 결렬을 뜻한다. ‘소연’은 스스로의 몸이 인간의 영역과 조류의 영역 중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하고 이뤄질 수 없는 꿈처럼 부유할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좋은 배우](신연식, 2005)에서 ‘수영’을 비롯한 배우들이 외부로부터 자신들에게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과 소통, 그리고 시행착오의 반복 과정을 통해 구하는 인물들이라면 [배우는 배우다]의 ‘오영’은 오직 자기 존재로서 질문을 파생시키고 그 답에 자기 존재로서 도달하려고 하는 인물이다. 두 영화는 비슷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답은 전혀 다른 층위로 산출된다.

  영화에서 ‘오영’의 몸은 현실과 연극,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든다. 신연식은 자신의 몸을 지배하지 못한 인물을 경계의 바깥으로 유목시킨다. 오프닝 씬에서 ‘오영’은 무대가 아닌, 무대 바깥에서 연극을 하고, 영화 촬영 씬에서도 영화적 공간과 현실적 공간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특히 연극 시퀀스는 관객에게 많은 혼란을 주는데, 관객들로 하여금 결국 어떤 서사도 믿지 못하게 한다. 오프닝 씬에서, ‘오영’이 마네킹을 세워두고 연기를 하는데, 이는 상대 배우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연기를 펼치는 ‘오영’의 왜곡된 연기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으며, ‘오영’이 실제로 겪었던 경험의 재현일 수도 있다. 신연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씬을 ‘오영’이 실제로 올랐던 무대와 연결시킨다. 무대 바깥의 공간이 무대 공간으로 전환되면서, ‘오영’의 몸은 역설적으로 무대 바깥으로 밀려난다.

  ‘오영’의 연극적 페르소나가 ‘오영’의 몸을 견디기엔 ‘오영’의 몸은 이미 트라우마로 과부화된 몸이다. 연극적 문법과 질서가 있고, 그 체제나 제도를 수용하는 것이 배우의 사명인데, ‘오영’은 자신이 견디지 못한 삶의 영역으로 극의 외연을 확대시키고, 극의 흐름을 변환시킨다. 배우의 몸, 배우의 페르소나로서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라, 좌절과 결락을 거친 인간의 몸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그 때의 무대는 이미 무대가 아니다. ‘나’와 타자, 무대와 객석, 삶과 연극의 경계에서 자신의 몸을 잃어버린 자가 빈 몸을 유목시키는 허상의 공간일 뿐이다.

  ‘오영’은 공연이 끝난 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오연희’와 대면한다. ‘오연희’는 자신의 재기를 망친 ‘오영’을 원망한다. 그런데 이 씬 또한 불확실한 경계를 내포하고 있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에 나누는 것으로 보이던 대화는, ‘오연희’에 의해 너무나 잘 아는 관계에서 나누는 대화의 양상으로 전환된다. ‘오영’ 또한 ‘오연희’의 대사를 자연스럽게 받으며 그녀에게 사과의 뜻을 전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오연희’는 페르소나를 전환시켜 ‘오영’과 함께 연기했던 배우의 모습으로 인사를 전하고(아까 좀 이렇게 하지 그랬어요.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다음에 기회 되면 이 작품 다시 해요.) ‘오영’에게서 멀어진다.

  무대 공간에서 배우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오영’은 무대 외의 공간에서 배우로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역설은 ‘오영’을 더욱 참담하게 만든다. 그리고 ‘오영’이 무대에서든, 무대 밖에서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영’은 연극을 통해 자신의 몸을 증명하고 싶어 했으나 결국 증명에 실패한다. 몸의 증명의 실패는 곧 운명의 실패다. 하지만 실패한 운명의 결과가 모두 죽음인 것은 아니다. [러시안 소설]에서 ‘정석’의 죽음을, <타임 투 리브>에서 ‘엄마’의 죽음을 실패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오영’의 운명이란 것이 연극에 투지(投地)된 어떤 가능성의 생이라고 할 때, 연극으로부터 격리된 ‘오영’의 운명은 증명의 실패로부터 귀결된 실패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영화는 허구다. 하지만 관객은 허구의 텍스트라는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구축된 실재의 서사를 본다. 영화가 거느리는 서사의 진위 여부나 현실적 재현 가능성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인물의 사랑 이야기 [뷰티 인사이드](백종열, 2015)도 로빈슨 표류기의 ‘화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마션](리들리 스콧, 2015)에서의 서사도 모두 다 ‘영화적 사실들’일 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화 내부세계의 경계를 확실히 지음으로써 영화 외부의 경험과 지식의 간섭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신연식은 허구와 사실, 영화와 실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영화가 허구라는 기본 전제를 의심하게 만든다. 알랭 바디우는 영화는 보이는 것의 확실함을 겉보기에 불확실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알랭 바디우, 알랭바디우의 영화, 한국문화사) 신연식의 영화에서는 확실한 사실의 근간마저도 불확실하다.

 

  경계와 탈경계의 서사

  [러시안 소설](2013)의 화소들, <조류인간>이나 <천년의 물약>, <귀 기울여 속삭이기> 등은 각각이 영화의 시퀀스이면서 동시에 극중 ‘신효’의 소설로 읽힌다. <통정> 또한 [러시안 소설]을 구성하는 한 화소이면서 ‘경미’의 소설이기도 하며, 동시에 ‘신효’의 소설이기도 하다.

 

  [러시안 소설]은 극중 인물이 쓴 소설과 영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인물들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영화 내부에 실재하는 서사인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허구적 사건인지 분별이 어렵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욥기의 구절과 낚시터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러한 수미상관의 방식은 영화의 시작과 끝의 경계 또한 명료하게 지정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같은 방식은 신연식의 영화에서 자주 노출된다. 신연식은 소설과 영화,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꿈, 시작과 끝 등을 정확하게 이분하여 그 지경을 구획하지 않는다. [배우는 배우다](신연식, 2013)에서는 ‘오영’이 출연하게 되는 영화가 <배우는 배우다>이고, [조류인간](신연식, 2015)은 ‘정석’의 소설 자체이다.

  박형서는 단편소설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에서 주인공 ‘부티’를 통해 장편소설, 『부티의 천년』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서사라 할 수 있다. 서사가 내부서사에 집중되지 않고 서사 밖의 또다른 서사를 겨냥하고 있는 것은, 자칫 소설이 스스로의 경계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소설이 아닌 것의 지점을 교묘하게 은폐한 서사의 운명은 그것이 다시 서사 본위의 것으로 귀환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러시안 소설]의 <조류인간> 또한 [조류인간]의 서사를 구체적으로 겨냥하지는 않지만 큰 얼개를 그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작품과 작품의 경계 구획이 희미해진다. 하지만 박형서가 『부티의 천년』이라는 (만들어질) 텍스트의 질서를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에서 규정하고 있는 데 반해 신연식은 <조류인간>에서 『조류인간』의 서사에 대해 많은 것들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조류인간]의 서사는 ‘정석’과 그의 아내 ‘한비’가 직접 겪은 일이자, 그 일을 소설로 쓴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영화가 관객에게 인양해온 서사를 소설로 환치시키는 것은 영화 내부에서 사실로 보여진 것을 단순히 픽션으로 각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각각의 텍스트에 메타적 호환성을 부여하여, 앙드레 말로가 이야기로서의 가능성 측면에서 영화와 소설의 강점을 이야기한 것처럼(이윤영 엮,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지성) 이야기의 동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이야기의 극대화된 동력은 신화 텍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신화 텍스트를 접하는 독자는 그것의 진위 여부를 논하지 않는다. 신화적 인물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발생했던 이적(異蹟)은 경험의 차원에서 수용되는 게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서 수용된다. 이때 신화의 서사는 일반화되고, 서사에 관여하는 초자연적 질서는 상징화된다. 신연식이 영화 내부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서사를 붕괴시키거나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말의 차원, 이야기의 차원에서 보여줄 수 없는(보여주지 않은) 것을, 경계의 차원에 양립시킨 텍스트와 텍스트 간의 장르적 간극과 그 간극에 소여되는 상상력을 통해 메우길 관객에게 권하는 것이다.

  도니 디드로는 소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를 통해 말과 소설의 경계를 보여주었다. 공교롭게도 말과 소설은 모두 ‘이야기’라는 동의어와 연결된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소설의 이야기가 영상언어로 뒤바뀐 서사적 구조물이다.

  신연식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이야기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때 장르는 이야기를 구속하지 않고 해방시킴으로써 장르와 장르가 호환되고, 작품과 작품이 교섭하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와 이야기는 변증의 작용을 거친다.

  [조류인간]에서 아내의 부재가 ‘정석’에게 어떤 결핍의 환경이라면, 아내를 찾아나서는 ‘정석’의 행동은 그 결핍을 해소하려는 시도이다. 그 팽팽한 길항은 영화 서사에서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자신의 눈앞에서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새로 환태한 아내와 대면한 상황에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그 이후 ‘정석’의 행적은 [러시안 소설]을 통해 밝혀진다. [러시안 소설]과 [조류인간]이 각각 다른 작품이면서도 그 경계의 구획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정석’이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려는 듯 목공소 일에 몰두하거나, 낚시로 소일을 하는 시간이, ‘정-반(正-反)’의 길항이 소강의 국면에 이르는 지점이라 할 때, ‘정석’이 아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수용한 뒤, 죽음이라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지점(중년 '신효'의 내레이션을 보면 '정석'의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분명치 않으나, 여러 정황을 비춰볼 때 그의 자살을 유추할 수 있다. )이 바로 '합(合)'의 지점이다.

 

 

 

 

    AS로마의 프란체스코 토티, FC바르셀로나의 리오널메시나 이니에스타,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축구를 시작한 이래로 팀을 한 번도 옮기지 않은 원클럽맨, 팀과 '나'가 하나되는 팀아일체의 표본이다.

 

   나는 여자에게는 무수히 거짓말을 해왔지만 로마에게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말은 토티의 말이다. 로마의 왕자, 토티가 AS로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클럽맨은 선수인 '나'의 겸양이나 (구단과의 계약 관계에서의) 양보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팀에 충성심이 높은 선수라도, 기량이 눈에 띄게 저하돼 더이상 팀에 보탬이 되지 않는 선수를 데리고 있을 팀은 없다. 원클럽맨은 절대적인 기량과 팀에 대한 애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원클럽맨이라는 용어는 축구계에서 빈번히 사용돼 왔다. 위에 언급한 인물 말고도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축구스타들이 자신의 단 하나의 팀을 떠나는 걸 원치 않았다. 더 좋은 조건, 훨씬 더 많은 연봉을 포기하면서까지 말이다.

   프로야구 FA시장이 더욱 과열되면서 우리나라 야구에서는 더이상 '원클럽맨'을 찾기가 어렵다. 이종범 선수(기아타이거즈 은퇴)나 이승엽 선수(삼성라이온스 은퇴)나 김태균 선수(한화이글스) 같은 이름이 떠오르지만 그들은 모두 일본 진출을 시도했다가 다시 원래의 팀으로 복귀한 사례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원클럽맨'이라고 칭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안다. 이들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들을 모두 원클럽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 강민호 선수가 두 번째 FA를 통해 팀을 옮겼다. (롯데자이언츠 → 삼성라이온스) 자이언츠 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팀 팬들조차 강민호 선수의 이적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롯데의 강민호!'가 아니던가. 부산을 사랑했고, 자이언츠라는 팀에 충성을 다했고 팬들에게도 늘 고마워했던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지만 커뮤니티 사이트의 중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강민호 선수 FA 계약을 대하는 구단의 태도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돈'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다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하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구단의 태도라는 것에는 '돈'이 빠질 수 없는 문제니까. 어쨌든 자이언츠는 구단의 역사에, 팬들의 마음속에 길이 남을 '원클럽맨'을 잃게 되었다.

 

  제가 소설을 쓰는 첫번째 이유가 돈인 것은 아닙니다. 세번째 이유쯤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인생을 걸고 어떤 일을 할 때, 세번째 이유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 밥벌이의 싸움을 피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참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첫번째, 두번째 전장을 가벼이 여긴다는 의미가 아님을 잘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계속 싸워서 글과 돈을 열심히 벌어보겠습니다. 쓰고 싶은 소설을 다 써서 더이상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겠습니다.

-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문학동네) 서문

 

  프로선수의 가치는 금액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돈'이 프로선수가 지향하는 모든 것은 아니다. 강민호 선수가 야구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돈'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그가 그동안 야구에 대해, 롯데자이언츠에 대해, 그리고 팬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해오고 행동해왔던 것을 보면,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나 '세 번째'에 가깝다. 그러나 장강명 작가의 말처럼 두 번째나 세 번째라고 해서 강민호 선수에게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결국 프로선수의 가치는 금액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도 중요할 것이다. 그 과정은 구단과 강민호 선수만이 아는 것이다. 어쩌면 강민호 선수 혼자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일을 함께 겪고서도 그 과정에 대한 기억의 결과값이 서로 다른 일이 얼마든지 많으니까.   

 

   작년 양현종은 기아타이거즈와 22억 5천만원 단년 계약을 맺었다. 물론 큰 돈이지만 양현종 선수가 지닌 실력과 가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계약이었다. 무엇보다 기량이 떨어져 팀 공헌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노장 선수를 제외한다면, FA 기회를 단년 계약으로 '날려버릴' 선수는 없다. 바보같은 계약이었다. 그러나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양현종이기 때문이다. 기아타이거즈라는 팀밖에 생각해보지 않은 양현종이기 때문이다. 양현종이 일 년 뒤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구단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원클럽맨' 탄생에 기여하는 다양한 요인들이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일단 기아타이거즈라는 팀밖에 생각해보지 않은 양현종의 충성심, 그리고 여전히 양현종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단, 보너스로 일 년 뒤에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구단의 태도(돈과 신뢰의 문제) 등이다.

 

 양현종 선수는 올해 20승을 올리며 그의 존재 가치를 더욱 확고히 했다. 이제 구단이 일 년 전 약속한 신뢰를 보여줄 시기이다. 기사대로라면 구단 측에서 계약 내용을 제시했고, 양현종 선수의 응답을 기다리는 단계라고 한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그 응답만을 기다리면 안 된다. 가만히 앉아서 양현종 선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은 자칫 다시 한번 그에게 양보와 희생을 강요하는 게 될 수가 있다. 응답을 기다리지 말고 응답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게 구단이 일 년 전의 약속을 이행하는 방법이다. 양현종은 이미 여러 차례 원클럽맨을 향한 의지를 보인 바 있다. 선수의 충성심과 애정에 대해 구단을 현재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구단의 태도로 인해 양현종의 '원클럽맨' 의지가 결렬될 때, 팬들은 구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부디 아무것도 안심하지 말기를.   

 

  차일목 선수가 2017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팀은 한화이글스였다. 그는 2차 드래프트로 팀을 옮긴 후(기아타이거즈 → 한화이글스) 전적 팀에서보다 훨씬 안정적인 위치에서 포수 포지션을 소화했다. 안정적인 리드와 수비 실력에도 불구하고 차일목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수비 능력에 비해 공격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포수 포지션이 취약한 기아타이거즈에서 김상훈 선수와 함께 분투해준 선수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 야구선수로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1999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프로 지명을 받았을 때일까? 아니면 2009년, 기아타이거즈에서 처음으로 통합 우승을 했을 때일까? 아니면 2015년 시즌 후, 2차 드래프트에서 한화이글스의 지명을 받았을 때일까? 그것도 아니면 2011년 SK와이번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엄정욱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쏘아올릴 때였을까.

 

  모두가 다 찬란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프로선수로서 지명됐을 때는 야구를 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2009년 처음으로 우승을 경험했을 때는 그 생각이 더 분명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매순간, 부침 없이, 기쁠 수만은 없다.

 

  차일목은 2014 시즌이 끝난 뒤 FA 자격을 얻게 되었다. FA 계약은 야구선수라면 당연히 품게 되는 꿈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차일목은 구단과 원만한 협상을 하지 못하고 시장에 나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차일목은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여기서 자존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프로 선수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기실 실력과 그로 인한 위상에 근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단과 협상에 임하는 선수 개인의 자존심이 선수로서 쌓아올린 스탯과는 별개로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인간적 자존심이다. 구단에서는 협상이 결렬된 뒤 차일목에게 얼마든지 다른 팀을 알아보고 조건에 맞으면 계약하고, 맞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다른 팀과 협상을 진행해도 소위 ‘괘씸죄’를 묻지 않겠다는 뉘앙스였는데, 차일목에게 그 말은 구단에 자신이 그렇게까지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 말은 포수 차일목에 대한 부정이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성실한 자세로 홈플레이트를 지켜오지 않았는가.

 

  차일목은 야구를 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이군을 전전하면서도 자신이 야구선수로서의 삶을 택한 걸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었던 그였기에 그 후회는 자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차일목은 2년 총액 4억 5천만원에 기아타이거즈와 FA계약을 맺었다. 차일목은 자신을 강민호 선수 같은 일류 포수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자신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프로라는 세계의 냉정한 현실이었다.

 

  2011년 9월 18일, 후반기 투․타의 이례 없는 침체 속에 타이거즈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아직 2위를 포기할 수 없는 시점이었다.

  11회말 2사 만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차일목이었다. 대다수 팬들은 타석에 들어선 선수가 차일목이라는 사실에 낙담했다. 덕아웃에서도 12회초 마운드에 올라올 투수에 대해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차일목이 트윈스의 신성 임찬규 선수를 상대로 만루홈런을 때려낸 것이다. 그것도 끝내기홈런이었다.

 

  차일목은 그 때와 같은 환희가 한 번쯤 다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차일목은 2015 시즌 후, 2차 드래프트에서 한화이글스의 지명을 받아 팀을 옮기게 되었다. 이미 타이거즈는 백용환과 이홍구 선수, 두 명의 포수로 2016 시즌을 구상하고 있던 터였다. 더 이상 타이거즈 배터리에 차일목 선수의 지분은 없었던 것이다. 차일목은 자신에게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평균의 수비력과 안정적인 투수리드’가 장점인 자신에게 그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포수진이 약한 편이었던 한화이글스에서 다시 한번 시작해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2016 시즌, 차일목은 한화의 새로운 포수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누군가는 조인성 선수와 정범모 선수의 부진을 틈타 차일목이 무주공산을 점령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차일목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투수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배터리의 조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한 선수다. 비록 2017 시즌은 부상과 그 여파로 많은 경기에 나서진 못했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2018 시즌, 한화이글스의 새로운 코치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시 이렇게 질문한다. 차일목, 그에게 가장 짜릿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아마도 ‘야구’를 했고, ‘야구’를 하고 있고, ‘야구’를 하게 될 모든 순간이 아닐까.

 

  아이는 감정 표현이 남다른 아이였다. 엄마 품에 안겨서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몸부림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울곤 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를 때가 많았고, 아이보다 더 절망적인 표정으로 화를 낼 때도 있었다.(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그 순간에는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인가.)

 

  잠시 외출한 엄마를 찾으며 집이 떠나가라 울었던 적이 있다. 엄마, 금방 올 거야. 괜찮아, 라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말을 알아들을 시기가 아니었으니까. 아니, 아빠가 말한 의미를 알고 있다고 해도, 아이는 그 말을 수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당장 엄마가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진, 아빠를 괴롭힐 거야, 하고 마음먹은 것처럼 질질 짜고 뭔가를 집어던지고 그랬다. 그러던 아이가 조금씩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떼를 쓰는 일이 많고(특히 아빠에게, 아니 오직 아빠에게만. ㅜ), 소심하게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하지만, 아이는 화나거나 울고 싶은 마음을 예전처럼 과하게 표출하지 않는다.

 

  어느 날은 유치원에서 감정에 대해 배웠던 모양이다.

  엄마는 화나. 도도는 슬퍼. 엄마는 기뻐. 도도도 기뻐.

  유치원에서 배워온 감정 표현의 말을 종일 반복했다고 한다. 아이의 말놀이는 오래 갈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가 그 말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그 순간만 그러고 말았던지, 아빠 앞에서는 한 번도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를 씻기고 막 욕실을 나서려는 순간, 아이가 물비누를 짜서 제 팔뚝에 발랐던 모양이다. 엄마도 모르게,

 

  도도야!! 다 씻어놓고 그러면 어떡해!! 라고 소리쳤나 보다.

  그랬더니,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엄마 화나, 아니야. 엄마 기뻐야. (엄마, 화내지마, 엄마는 웃어야 돼.)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아이를 놀래킨 게 미안하기도 해서,

  그래, 엄마 화나, 아니야, 기뻐야, 라고 말하면서 아이를 안아줬다고 한다. 아이의 심장이 빨리 뛰고 있었다고 한다. 쿵쿵. 아이는 엄마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 둘도 없이 자기만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오늘도(2017.8.31)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역시 아이를 씻기고 몸을 닦아주고 침대에 잠깐 앉혀놓고 잠깐 뭔가를 하는 사이, 아이는 제 손목에 선블록을 바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순간에도 아이가, 뚜껑을 열고 밑면의 롤을 돌려 고체 형태의 블록을 돌출시켜 그걸 발랐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했단다.)

  당황한 엄마는 이번에도 도도야!! 라고 비명을 지르듯 아이를 부른 모양이다. (엄마는 자주 당황하고, 아무 일도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떤다. 긴급재난문자보다 엄마의 외마디가 아빠를 더 놀라게 한다.)

  순간적으로 움찔한 아이는 자신이 하고 있던 놀이를 멈추고, 엄마를 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엄마, 기뻐야. 라고, 말했단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기쁜 말인가. 비록 자신의 의도를 어법에 맞지 않게 표현한 것이지만, 아이의 말을 그대로 풀어보면, 엄마는 기쁨이라는 뜻이 된다. 아이에게 엄마는 기쁨이지, 슬픔이나 화남은 아닌 것이다. 엄마에게도 마찬가지다. 엄마에게 자신은 기쁨이다. 엄마가 화난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면 마음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는 것이다.

  엄마, 이 정도의 일로 ‘슬픔’이면 어떡해. 우린 서로에게 ‘기쁨’이잖아.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이보다 우리가 더 감정 표현이 서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잊어버렸던 기쁨이라는 감정을 시시때때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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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엄마에게 인사해. 라고 하면 아이는 고개를 얼른 숙이고 쭈따쭈따, 라고 말한다. 이 때의 쭈따쭈따는 다녀올게요, 라는 뜻이다.

 

  집에 오는 길에 노래를 부르면서도 쭈따쭈따, 를 외친다.

 

  주의 말씀은, 쭈따쭈따!!

 

   이 때의 쭈따쭈따는 내 발에 등이요, 라는 뜻이 된다.

 

  쭈따쭈따는 아이의 모든 말이다.

  아이가 이상하게 말할 때마다 귀엽다고 웃어 넘기지 말고, 바르고 정확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육아서에서 수도 없이 보았지만, 아이는 이상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주술처럼 신비스럽게, 비밀처럼 은밀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일종의 놀이이다. 말을 가지고 노는 놀이. 아이가 작고 야무진 입술로 만지는 말들이 나에게는 새로운 의미가 된다.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겠으나,)

 

  어떤 날은 전혀 맥락 없이,

  아빠, 쭈따쭈따! 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쭈따쭈따가 뭐야, 알려줘, 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아니야, 쭈따쭈따, 안 알려줄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쭈따쭈따는 지금 아이가 쓰고 있는 자신만의 방언인 셈이다.

 

 

  *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이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곰돌이가 걸어갔어요.

 

    아마, 곰돌이와 노는 꿈을 꾸었나보다.

 

    진지할 땐 정확하게 표현한다.

    왜 곰돌이 때문에 진지해지는 건지 아빠는 아직 잘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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