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썼던 소설, 쓰다가 만 소설, 쓰고 싶었던 소설은 <쇼코의 미소>의 형식이나 의미를 크게 넘지 않은 범주에 있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썼던 소설과 쓰지 않은 소설, 그리고 곧 써야할 소설, 쓸 수 있는 소설이 <쇼코의 미소>에 미치고 있다(미칠 것이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쓰다 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맑은 소설을 쓰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던 것이다.

 

  소설 두 편이 세계의문학 심사평에 올랐던 적이 있다. 최종심에 오른 것이 내게 어떤 위안을 주지도 않았지만, 최종심에서 떨어졌다고 낙심하지도 않았다. 내가 쓴 소설은 내가 보기에도 딱 그 정도의 소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 가능성이 소설이 지녀야 할 미덕을 모두 대변해줄 수는 없었다.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 소설을 읽었던 한 평론가는 두 편을 일러 아름다운 소설, 이라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그 말보다 ‘전근대적인 것 중에서 덜 근대적인’이라는 말이 내 소설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새로움, 그것은 소설을 쓰는 내내 시달리는 강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세계를 구축해놓고 소설을 써보기도 했지만, 거기에 ‘새로움’이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세계를 읽는 감각의 새로움이 필요했다. 내게는 부족했다.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계속 쓰고 싶었다. 시처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서영채는 <쇼코의 미소>를 두고 ‘새롭지 않은, 좋은 소설’이라고 했다. 새롭지 않아도 좋은 소설일 수 있다는 말일까.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는) 할아버지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한 불완전한 가족서사, 쇼코와 소유의 아슬아슬한 감정들, 그들이 버틴 청춘의 내막이 밝혀지면서 비로소 온전해지는 관계 등이 새로운 이야기일 리는 없다. 그러나 <쇼코의 미소>는 최은영이 발휘하는 새로운 감각에 의해 이야기의 탄력을 얻고 있다.(사실 새로운 감각마저도 아닐 수 있다. 지나치게 둔감해진 우리가 다시 느껴야 할 전근대적인 감각일지도 모른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정류장까지라도 같이 가자고 하니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그냥 이대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이 빨개졌다. 울고 싶으니까 그냥 풀어달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놓았다. 할아버지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울고 싶다고 말하지 못할 때가 있다. 촌스럽기 때문에. 그런데 이 촌스러운 감정들이 글을 읽다 보면 촌스럽지 않게 된다. 가령 이런 부분 때문이다.

 

 

  쇼코는 할아버지의 여름 중절모를 썼고, 나는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던 베레모를 쓰고 갔다. 납골당 안에는 쇼코가 찍어준 우리 가족의 사진과, 천변 벤치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사진이 있었다. 두 장 모두에 쇼코의 시선이 내려앉아 있었다. 쇼코는 납골당 유리문에 두 손바닥을 대고 말했다.

  “미스터 김.”

  그 말을 하고 우리는 뜻 모르게 같이 웃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도 이런 대목에서는 모든 의심을 지우게 된다. 할아버지의 납골당 앞에서 쇼코와 소유가 함께 치르는 의식에는, 둘만이 공유하고 있는 내밀한 정서가 돋보인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새롭지 않음으로도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으므로.

 

  잘려나간 사진의 귀퉁이에 반쯤 드러난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프레임의 질서와는 상관없이 내가 서 있었지만, 그 사진 어디에선가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 나를 배려한 듯한 흔적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 사진을 보고 소리 없이 울다가 사진을 찍어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횡설수설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기억은 예상치 못한 데서 선명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