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변산]은 문학적이다. 초창기의 영화가 문학작품에 그 서사를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많은 문학작품이 영화화되었다. 그 중 이범선의 <오발탄>을 원작으로 한 [오발탄](유현목, 1961)은 아직까지도 손꼽히는 명작이다. 문학적인 영화에 대한 인상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문학적인 영화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문학적인 영화라면 뭔가 지루하고 정적이며 교시적일 거라는 게 일반 대중들의 생각이다.

 

 이창동 감독의 [시](2010)에서 한 소녀의 죽음으로부터 발생된 자신의 죄악을 온몸을 내던져 씻어내고자 했던 ‘미자’의 사투는 역동적이지 않다. 움직임은 느슨하고 동선 역시 제한적이다. 그러나 손자가 성폭행사건에 가담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녀가 보아온 시의 풍경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동일한 템포로 서사는 흘러가지만 ‘미자’의 내면은 빠른 속도로 무너진다. 그런 ‘미자’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 [시]의 주제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바, 그에 맞는 속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미자’가 보아온 자연 그대로의 풍광들이 카메라에 담길 때 속도는 왜곡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자’가 ‘희진’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속도는 생사를 앞질러갈 만한 속도이다. 문학적인 영화 [시]는 그래서 결코 지루하거나 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위태로운 인물의 내면을 아슬하게 비춰주면서 특유의 긴장감을 유발하고, 물리적인 속도를 뛰어넘는 역동성이 영화의 엔딩을 장식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변산]은 문학적인 영화다. 아름다운 서정이 있고 정제된 의미가 있다. 미장센은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학수’가 귀향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변산]의 서사는 ‘학수’의 탈향에 대한 욕망으로 추동된다.

 

 ‘학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랩을 할 때 사투리를 쓴다는 지적에 자신의 고향은 서울이라면서 변산을 부정한다. 에드워드 렐프에 의하면 ‘장소’는 인간에게 공동체적 공간을 부여하고 세계와의 관계 결속을 통해 그 실존의 근원을 깨닫게 한다. 특히 렐프에게 ‘집’과 ‘고향’은 인간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은 구성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연대와 내밀한 관계성을 갖게 되는 보편적 장소이다. 학수가 고향 변산의 장소성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근원지에 대한 부정이고 이는 곧 자기부정으로 이어진다. 자기부정은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린다. ‘학수’는 여섯 번째 참가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어머니’를 주제로 한 미션을 뛰어넘지 못한다.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고향 변산을 떠올리게 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까지 소환시키기 때문이다. ‘학수’의 아버지는 바로 아내의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학수’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긴 인물이다.

 

 ‘학수’는 동창 ‘선미’의 계략(?)으로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오게 된다. 고향에 내려오긴 했지만 아버지에겐 냉담하고 포악하기까지 하다. ‘학수’라는 인물이 눈에 띄게 유아적 성향인 건 아쉬운 대목이다. 이준익 감독은 작심하고 ‘학수’를 찌질한 캐릭터로 만들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좋은 일은 생기지 않는다. ‘학수’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몰리기도 하고, 자신의 시를 훔쳐 신춘문예에 당선된 선배를 만나기도 한다. 어렸을 때 ‘꼬붕’이었던 동창생이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학수’를 옥죄어 오고, 실패한 첫사랑을 다시 만나지만 ‘용대’에 의해 여의치 않게 된다.

 

 ‘학수’의 기억에 의존한 플래시백은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트라우마를 갖게 된 ‘학수’가 아버지와 화해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전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산]이 의미가 있는 것은 힙합이라는 장르를 충분히 살린 음악영화이고, 그 노랫말이 서사의 결을 성실히 따라가고 있다는 데 있다. ‘학수’가 직접 짓고 부르는 노랫말은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이다. ‘용대’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사실 ‘학수’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관객을 설득시키지는 못한다. 흘러나오는 학수의 랩은, ‘자신의 상황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선미의 대사)’ 학수 자신에 대한 질책이다. 성공하지 못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왔고, 애증의 아버지와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고, 자신의 첫사랑은 자신의 ‘꼬붕’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동창 ‘용대’에게 빼앗겨버렸고, 자신을 좋아했던 여자 동창생 ‘선미’는 어느새 작가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학수’는 자신을, 자신의 상황을 더욱 부정하게 된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수 있는 건 노을뿐이다.

 

  이 시는 ‘학수’가 고등학교 때 썼던 시의 도입부이다. ‘학수’는 잊고 있었지만 그 기억은 ‘선미’에 의해 온전히 복원된다. ‘선미’에게 ‘학수’는 단순한 첫사랑이 아니라, 시에 눈을 뜨게 해준 스승과도 같다. ‘학수’는 ‘선미’마저도 부정하기 급급하지만 ‘선미’가 보여주는 진심과 시에 대한 진지한 태도 덕분에 조금씩 ‘앞’을 보게 된다. 아버지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던 ‘학수’는 아버지를 정면으로 보게 되고, 벼르고 별렀던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아버지를 살해하는 영화도 있긴 하지만 장르의 특성상 학수가 아버지에게 펀치를 날리는 장면은 과한 듯하다. 아버지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아버지에 대한 증오나 복수심을 뛰어넘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학수’는 자신의 또다른 트라우마가 돼버린 ‘용대’에게 맞서기로 한다.

 

  ‘학수’와 ‘용대’가 갯벌에서 격투를 벌이는 동안 변산초등학교 동창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학수’와 ‘용대’의 일전은 시작부터 김이 빠진다. [영화는 영화다]의 엔딩씬을 비장하게 오마주한 시퀀스는 ‘선미’가 개입한 순간부터 코믹하거나 싱거운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고 짐작이 되었다.

 

 ‘학수’는 ‘용대’와 일전을 치른 뒤 ‘용대’를 ‘파리○’이라고 비아냥거린다. ‘학수’는 어린 시절 ‘용대’를 그렇게 취급했었다. 동창생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유년의 기억을 복원한다는 것은 자신의 근원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용대’가 등장하면서 촉발되었던 긴장감은 맥거핀으로 소모되지만, ‘용대’ 또한 [변산]에서 ‘학수’에게 큰 동기 부여를 하는 인물이다.

 

  ‘변산’은 낙후된 시골공간이다. 인물들의 사투리는 촌스럽고 의식도 그렇다. 적어도 ‘학수’에게는 그런 이미지이고 사실 객관적인 이미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촌스러움, ‘학수’가 벗어던지고 싶은 누추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변산’이 촌에 위치해 있으니 그곳의 인물과 정서가 '시골스러울' 수밖에 없다. 촌스럽다는 말의 부정적인 의미를 걷어내면 정답고 따뜻한 것들이 있다. ‘선미’가 지켜온 노을이 그렇고 그 노을이 번지는 ‘폐항’이 그렇다. 친구들이 10년 동안 지켜왔던 학수 모의 산소가 그렇고 ‘선미’를 비롯한 많은 변산 사람들이 구사하는 사투리가 또 그렇다. 폐항의 노을은 아무리 누추를 걸치고 고향에 돌아온 이가 있어도 그 자에게 ‘금의’를 입혀준다. 그것을 ‘학수’에게 일깨워준 사람은 다름아닌 ‘선미’이다. ‘선미’는 문학상을 받은 기념으로 이뤄진 인터뷰에서도 사투리 쓰기를 서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근원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근원지로부터 더 멀리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떠나는 행위는 ‘나’가 누구인지 명확한 인식 이후에 가능하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떠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떠난 것이 아니라 지워진 것이다. '학수'가 무시해왔던 고향 친구들이 '변산'의 장소성과 저마다의 근원을 지켜온 덕분에 '학수'는 다시 이들과 -에드워드 렐프가 말한- 내밀한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동질성과 자기근원, 장소성을 갖게 된다. '학수'가 새로운 것을 획득하는 게 아니라 원래 갖고 있던, 그러나 부정했던 것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변산]의 문학성을 말해야 한다. 변산은 바다와 뭍이 만나는 곳이다. 경계와 접점의 공간이다. 노을도 그렇지 않은가.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서 노을이 진다. ‘학수’가 변산에 내려온 이후 주로 있는 곳은 병원이다. 그 병원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다. ‘학수 부’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거류민처럼 떠도는 ‘학수’는 그렇게 경계를 떠돈다. 주변을 맴돌고 관계를 겉돈다. 경계에 서 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 경계 안쪽으로 들어오거나 아예 경계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학수’의 경우 경계 안쪽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것으로서 떠돎을 끝낸다. 그리고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경계를 지운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 사투리에 대한 경멸, 과거에 대한 부정, 경계가 지워짐으로 ‘학수’는 비로소 온전한 자신의 기억을 복원하게 된다. 그 기억은 엔딩씬에서 ‘학수’가 선보이는 랩에 축약돼 있다. [변산]의 힙합은 슬프다. ‘변산’과 같은 어정쩡한 공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과 같다. 하지만 포즈가 어설픈 것이다. 포즈가 어설프더라도 그들의 정서는 섬세하고 그들이 구사하는 사투리의 ‘딕션’은 더 분명하다.

  [그 날 바다](김지영, 2018)는 그 날 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를 바라보는 최초의 시점을 두라에이스에 위치시킨다. 정부가 발표한 내용에도 두라에이스는 그 날 선상에 있었지만 실제 위치는 달랐다. 두라에이스가 레이더망을 통해 좌현 쪽으로 급회전하는 세월호를 감지했던 그 위치, 정부가 발표한 위치와 실제로 두라에이스가 있던 위치가 달랐던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은 거기에 숨겨져 있었다.

 

 

(NA) 오전 6시 40분경, 두라에이스는 진도관제센터 관할 구역에 들어선다. 8시 10분에서 20분 사이 좌회전 코스인 맹골 수도 입구에 도착했다. 이때 한 선박이 오른쪽에서 추월해 갔다. 그것은 여객선이었다. 맹골 수도 내에 두 섬 사이를 빠져나왔을 때, 문선장(두라에이스 선장)은 특이한 광경을 목격한다. 오른쪽 전방, 한 선박이 섬에 바짝 붙어 급회전을 하고 있다. 그 선박이 두라에이스 쪽으로 달려올 수도 있었다. 선박과의 교신이 필요한 상황. 그러나 해당 선박의 AIS는 꺼져 있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선박을 (문선장은) 계속 주시했다.

 

  진도관제탑으로부터 세월호 침몰 소식과 함께 구조 요청이 전해진다. 그러나 관제탑이 보내온 좌표엔 세월호의 AIS가 잡히지 않았다.

 

  (NA) 문선장은 직관적으로 조금 전 급회전했던 선박 쪽으로 항로를 잡게 된다.

 

  문 선장은 진도관제탑과 교신하면서 배에 탄 승객들이 배에서 탈출을 해야 인명 구조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세월호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가만히 있으라.

 

  문선장은 다급한 요청에도(라이프링이라도 사용해서 승객들을 얼른 배 밖으로 탈출을 시켜라,) 여객선 선원들은 해경들이 언제쯤 오느냐는 것만 확인할 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해경이 왔지만 해경들은 조타실로 향했다. 선내에서는 여전히 탈출 지시가 내려지지 않았다. 승객이 아닌, 선원들을 먼저 구했다. 그 사이에도 어린 학생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승객들은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조활동을 도우려는 민간선박들에게 관제센터는 엉뚱한 위치를 보내주었다. 이쯤 되면 이런 전제가 가능해진다.

 

  정부는 처음부터 구조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뜯어보면 더 무서운 전제가 추론된다. 처음부터 구조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구조를 해야 하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가능해진다. 구조를 해야 하는 어떤 상황.

 

  고의침몰이다.

 

 

  고의침몰은 세월호 침몰 이후 꾸준히 제기됐던 가설이다. 정황이 그랬고 유력한 심증들이 계속 불거져 나왔다. [그 날 바다]는 수백, 수천 번 복기되었던 세월호의 항로를, 정부 발표 자료, 생존자 증언, 선원들의 증언, 전문가(물리학자) 자문, 선내 적재된 차량 내의 블랙박스 등을 재검토하며 되짚어간다. 만약 두라에이스가 없었다면 세월호 진상 규명은 정말로 요원한 일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김지영 감독.

  김지영 감독은 세월호 침몰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고 밝힌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호 항로 재구성에만 6개월을 매달리는 집념을 발휘한 끝에 세월호 침몰 4년 만에 [그 날 바다]를 세상에 공개했다. 세월호를 다룬 첫 번째 추적다큐였다.

  프로젝트의 시작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홍보영상을 만들어달라는 유가족의 부탁이었다. 김지영 감독은 어린 유가족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김지영 감독은 다큐팀과의 회의를 통해 정부가 발표한 자료부터 분석하기 시작한다.

 

  감추려는 자가 범인다.

 

  정부가 발표한 자료에는 허점이 많았다. 이상한 자료였다. 사고 당일 새벽까지 세월호의 항적 기록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3시 40분경, 갑자기 대전의 데이터 저장이 중단되었다. 그런데 또 갑자기 다음날 8시 50분경의 세월호 항적기록이 발표된다. 목포관제센터에 저장된 것이라고 했다. 직진하던 세월호가 급격한 우회전으로 인해 좌초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우회전 구간 항적의 데이터는 또 없었다. 세월호의 AIS가 꺼져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4월 21일, 세월호 AIS가 꺼져 있었던 그 구간의 항적기록이 다시 공개된다. 그것도 목포관제센터에 저장돼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서거차도의 관제자료에 남아 있던 데이터와 비교했을 때 정부가 발표한 세월호 항적 기록은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 해군 레이더 항적도가 공개된다. 이 항적도에 따르면 8시 30분경부터 세월호가 급격한 좌회전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중간 자료가 없는 데이터였다. 일부를 공개하고 일부를 감추었다. 단순사고라는 결론을 위해 데이터는 은폐되고 누락되었다.

 

  다큐팀의 추적은 한계상황에 부딪힌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지영 감독은 열악한 환경에서 왜 [그 날 바다]를 만들어야 했는가. 웬만한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김지영 감독은 [그 날 바다]를 통해 항간에 회자되는 음모론을 제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진실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다큐라는 장르의 목적성은 어떤 사실의 기록을 통해 진실의 가치를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날 바다]가 다루는 세월호 침몰은 사실의 기록 자체의 복원이 어려웠다. 사실 기록이 고의로 숨겨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배제하고 세월호 침몰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과 유가족들을 달래는 내용으로 다큐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지영 감독은 애초에 그런 다큐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세월호 침몰의 진짜 진실을 밝히는 것이 희생자들과 유가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사회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김지영 감독의 신념이 [그 날 바다]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그 날 바다]는 마침내 어떤 한 가지 진실에 당도한다. 그 진실에 대한 언급은 그 영화를 보게 될 사람들을 위해 아껴두기로 한다.

 

  엔딩씬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모여 즐겁게 노래를 부른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쯤의 상황이다. 프레임 속의 아이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차례대로 패닝되면서 화면에 뜨는 이름 앞에 쓰인 ‘고(故)’라는 말이 낯설다. 여전히 누군가의 가슴속에는 그렇게 생생히 살아 있을 아이들, 그 아이들과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몸이 자꾸 왼쪽으로 기울었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좌현으로 기울어진 채다. 그 기울기를 감당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고 해도 [그 날 바다]를 꼭 보았으면 좋겠다.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3653

 

  김지영 감독이 세월호 다큐 내레이션 작업 의뢰를 했을 때 정우성 님은 고민도 하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멋진 분이다. 두 사람 다.

 

 

   [패터슨]은 패터슨에서 벌어지는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의 이야기다. - 나도 해리에서 벌어지는 ‘해리’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 그러나 [패터슨]에서는 어떤 '벌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이 미미하다.

  영화가 얼마나 잔잔하게 흘러가느냐면 버스회사 동료 도니가 겪고 있는 가정사가, 그가 늘어놓는 푸념이 영화에서 도드라져 보일 정도이다. 패터슨이 자주 가는 바에서 에버렛이라는 남자가 변심한 애인 마리 때문에 가짜 총으로 자살소동을 벌이는 씬은 이 영화에서 가장 상업적인(?) 씬이다.

  패터슨이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와 함께 사는 집은 요동치는 삶으로부터 한발 비껴서 있는 것 같지만, 정말 패터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패터슨은 시를 쓴다. - 그것만으로 얼마나 무지막지한 사건인가? - 아침 일찍 일어나 잠든 로라에게 입맞추고, 로라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 혼자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한다. 운행을 나가기 전까지 자신의 비밀노트에 시를 끼적인다. 패터슨의 시는 그의 쓰는 행위로 소환되었다가 내레이션으로 전사된다. 그의 일과는 시와 함께 흐른다. 너무나 평온하게. 그게 패터슨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라고 말했지만 화요일이나 수요일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시간은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다.)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패터슨이 집에 돌아왔는데, 집 앞, 우편함 기둥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패터슨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바로세운다.

  [패터슨]은 '균형'과 '불균형(기울어짐)'의 사이에 있는 이야기다.

  패터슨의 드러나지 않은 고민과 갈등은 그의 시 속에서 정제되고 질서를 갖추게 된다. 파문이 이는 물 위에 있지만, 그 중심에는 시심이라는 깊이가 있어 흔들림은 최소화되고 심지어는 무화된다.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난 것 같지 않은.

 

 

  컨트리가수를 꿈꾸는 로라가 몇백 달러를 호가하는 기타를 구매한다고 했을 때 패터슨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과 망설임이 어린다. 그러나 이내 로라의 뜻을 존중해준다. 로라가 집 내부를 단장하는 동안 조금씩 바뀌는 집안의 분위기와 패터슨의 얼굴이 교차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물리적으로 일어난 변화들로부터 패터슨은 침잠해 들어가길 원한다. (패터슨이 시를 쓰기 위해 지하방으로 가는 것을 보면, 가장 균형 잡힌 것처럼 보이는 삶의 형태가 어쩌면 가장 불균형해 보이기도 한다.)

  세 번째로 우편함 기둥이 기울어졌을 때, 패터슨은 화를 내는 것 같다. 그런데 화를 내는 대상이 꼭 패터슨 자신인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 패터슨이 아닌, 시를 쓰는 패터슨을 향한 분노이다. 그 순간 패터슨의 심정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더 이상의 평정은 어려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우편함 기둥을 다시 바르게 세운다. (우편함 기둥을 기울게 한 범인이 패터슨 부부가 기르는 애완견 '마빈'이었다는 것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패터슨이 갖고 있는 시에 대한 결벽을 나도 예전에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밤을 새워 다듬은 시를 가지고 우체국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던 기억은 여전히 불구의 몸으로 찾아와 시를 쓰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곤 또 우는 얼굴로 제발 시를 써달라고 애원한다.

  패터슨이 복사본을 만들어두라는 로라의 말을 듣고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자신의 시를 스스로 시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그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에게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로라가 패터슨에게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어렵다.

  로라와 함께 저녁을 먹고 돌아온 후, 패터슨은 마빈이 찢어놓은 자신의 비밀노트를 보며 절망에 빠진다. 로라 또한 마빈을 저주하며 집 밖으로 내쫓아버린다. 그 순간 패터슨이나 로라보다 더 절망한 건 나였다. 노트에 쓰인 시들을 절대로 다시 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패터슨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쓰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동요도 없는 지극히 평온한 삶을 얻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홀로 앉아 있는 벤치는 왠지 잔뜩 기울어져 보였다. 더치앵글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벤치 끝에서 엄청난 기울기를 견디고 있는 패터슨의 뒷모습을, 나 역시 아슬아슬하게 견뎠다.

 

  그 때 한쪽으로 기울어진 프레임의 반대쪽을 디디며 들어오는 한 일본인 남자(나가세 마사토시)가 있다. 그 남자가 패터슨에게 건넨 것은 노트이다. 남자는 노트를 건네고 홀연히 사라지지만, 패터슨은 어느새 삶의 균형을 되찾는다. 시로 인해 또다시 불균형의 세계를 만나겠지만, 그 때의 기울어짐은 한쪽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다른 한쪽에서도 역시 새로운 균형을 향해, 그리고 다시 어떤 기울어짐을 향해 끝없이 몸을 흔드는 무게가 있는 것이다.

 

  * 아담 드라이버를 비롯한 배우들은 카메라가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연기를 소화한 느낌이다. 짐 자무쉬 감독의 디렉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프레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천국보다 낯선]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뭐, 그냥 느낌이지만.  

 

  [1987]에서 프레임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캐릭터를 ‘박 처장(김윤석)’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1987]은 그의 시점에 매몰돼 있는 영화가 아니다. [1987]의 풍광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이 그랬듯 그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견딘 다양한 군상들의 시점에 의해 재현된다. 대개의 영화에서 감독들이 특정 캐릭터에 자신의 시선이나 가치를 고스란히 투영시키는 것은 영화의 보편적인 문법이다. 그러나 장준환 감독은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시대의 욕망을 택했다. 그 욕망을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장치가 바로 다양한 시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가라는 신념을 받들던 ‘조 반장(박희순)’이 자신에게 국가나 다름없던 ‘박 처장’의 진짜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두려움 가득한 눈빛은 실제로 그런 순간을 경험한 자의 동체를 이식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 만큼 처참했다.

 

  프레임에서 최소화되거나 은폐되었던 ‘안 계장(최광일)’의 시선은 어두운 밀실에서 이부영(김의성)에게 접견 기록을 건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데, 그 시선은 다른 캐릭터들이 지닌 그것의 무게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조카의 부검 장면을 내려다보는 삼촌(조우진)의 시선이나 박종철 열사(여진구)와 함께 내러티브의 수미에서 협응을 이루고 있는 이한열 열사(강동원)가 혼돈의 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마 마주볼 수가 없었다.

  장준환 감독이 여러 군상들의 시선을 프레임 안으로 끌고 들어온 것은 그 시대에 대한 최대한의 객관적 상(狀)을 제시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프닝시퀀스, 남영동 대공분실 탁자에 놓여 있는 안경에 비치는 상이라든가(그 때의 안경은 처참한 고문 현장을 어떤 누락과 은폐도 없이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렌즈가 될 것이다.), ‘공안부장(하정우)’의 차내 룸미러에 비친 상(윤상삼 기자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 기록이 담긴 박스가 비쳤던 것 같다.), 또는 ‘연희(김태리)’와 이한열 열사를 동시에 비춘, 신발가게의 거울도 기억에 남는다. 전투경찰의 군홧발과 몽둥이, 그리고 눈을 뜰 수조차 없는 최루 가스를 피해 들어선 신발가게의 거울에, 너무나 순수해서 어떻게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아름다움이 그 아름다움 그대로 거울에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안경이나 거울 등은 감독이 작심하고 거둬들인 카메라를 대신하여 영화 속의 또다른 렌즈로 작동한다.

  인간의 어떤 몸짓이나 인간과 관계된 어떤 현상이 객관적으로 떠오르기 위해선 그것이 맺히는 렌즈(거울이나 유리)가 투명한 것이거나, 적어도 그 렌즈 앞에 선 것을 바로 비출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박 처장’은 ‘조 반장’에게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자신 또한 공작의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때 ‘박 처장’은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본다. 그 액자는 투명한 것이 아니다. 액자 안에 들어있는 얼굴 때문이다. 카메라가 패닝되면서 ‘박 처장’의 얼굴이 마치 유리면을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상은 그래서 시대에 투지했던 ‘박 처장’의 순수하거나 객관적인 상이 될 수 없다. 유리면에는 몰락의 순간에도 자신의 모습과 행위들을 왜곡시켜야 겨우 직립할 수 있는(인간 흉내를 낼 수 있는) 추악한 몸체만 있을 뿐이다.

 

* 영화에서는 빈번하게 등장하지 않지만, ‘김정남(설경구)’은 그가 노출되지 않는 프레임 바깥에서 내러티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 자체로 거대한 미장센이 되는 인물인 것 같다.

 

* 그가 교회 외벽에 매달려 있다가 미끄러져 전선을 겨우 붙잡고 있는 씬이 있다. 그 때 교회 안에 있던 ‘박 처장’이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그의 그림자를 본다. 그의 실루엣이 유리창의 덧씌워진 예수의 형상과 겹쳐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뭔가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 씬 하나로 장준환 감독의 모든 영화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영화를 다시 한번 더 보고 [1987]에 대한 더 정교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경계에서 꿈꾸는 것들

  서사는 기본적으로 욕망을 함의한다. 욕망은 인간 본위의 것이고, 세계의 갈등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러시안 소설]에서도 욕망은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동력이다. ‘신효’의 욕망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순수하고 내적인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글쓰기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대타자적인 욕망이 강하다. ‘신효’의 욕망은 소설 본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 바깥에 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반영 행위이다. 즉, 자기자신과 타인과의 거리, 세계적 질서와의 관계를 파악한 이후, 임의의 지점에 자기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문제적 상황에 대한 자신의 대응 방식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결국 글쓰기의 실패에 좌절을 겪는 ‘신효’에 대한 구원은 ‘김기진’이라는 권위의 표상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효’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효’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자기기만적 글쓰기를 계속해 나간다. 그 결과 ‘신효’는 극심한 좌절을 경험한다. ‘재혜’가 건네준 약물을 받아 마신 ‘신효’는 27년이라는 시간 동안 잠을 자게 된다. 삶의 상태도 아니고, 죽음의 상태도 아닌 채로 잠을 자는 동안 ‘신효’가 이루지 못했던 꿈이 이루어진다. ‘신효’가 굉장한 소설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신효’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신효’가 여전히 자기기만의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효’는 영화 속 현실을 살고 있지만, 그 현실이 자신이 쓰지 않은 소설로 만들어진 현실이므로, 주체의 몸은 소거된다. 소거된 몸의 각성은 ‘신효’로 하여금 자기기만이라는 또다른 꿈으로부터의 각몽을 위해 ‘성환’을 찾아나서게 한다.

  한편 문단의 비주류로서 콤플렉스를 안고 있던 ‘경미’는 이민을 통해 자신의 욕망이 결렬된 경계 밖으로 자신의 몸을 최대한 이격시킨다. 몸을 이격(또는 은폐)시킨다는 점에서는 ‘성환’과 비슷하지만 ‘성환’이 ‘신효’의 몸을 빌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신효’가 욕망의 충동을 제어하지 않고 그대로 표출시킨다면, ‘성환’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한다. ‘성환’은 ‘신효’ 작품의 문제점들을 짚어낼 만큼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그것을 자신의 작품을 쓰는 데 할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효’가 새롭게 구상한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한 소설가 아들이 아버지와 비교되는 게 싫어서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의 작품을 개작한다. 아들은 자신이 쓴 이야기가 훨씬 더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아들은 자살하고 아버지의 명성은 더 올라간다.

 

  또한 ‘신효’가 ‘경미’에게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성환’의 특별한 정황이 포착된다. ‘신효’가 유명한 소설가의 아들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하자, ‘경미’는 그것이 ‘성환’의 이야기라는 걸 금방 알아차린다. ‘경미’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므로 그 이야기를 모티프로 소설을 쓰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한다. ‘성환’이 아버지 ‘김기진’의 작품을 대신 썼다는 확언은 영화에서 이뤄지지 않으나, ‘신효’의 소설 내용과, ‘성환’이 후반부에서 ‘신효’의 소설을 개작한 주인공임이 밝혀지는 것으로 그 확언은 대체된다. 그리고 내내 관찰자의 위치에 서 있던 ‘성환’이 후반부에는 서사의 확실한 중심으로 이동하게 된다.

  ‘재혜’는 ‘성환’을 모델로 쓴 ‘신효’의 작품이 마치 그리스비극같다며 감탄한다. 그리스비극에의 비유는 사실 ‘신효’의 소설 면면에 대한 ‘재혜’의 인상평가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리스비극이 함의하는 비극성은 [러시안 소설]의 하중을 견디고 있는 요체이다.

  비극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물리적 고통에 대한 임상적 반응을 초월한 가역 반응을 통찰한다. 그리스비극의 대표작 격인 「오이디푸스왕」에서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바로 자기자신이고, 자신이 어머니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겪게 되는 혼란이 자기부정과 자해 또는 자살로 이어진다. [러시안 소설]의 인물들은 부모가 동반자살하여 죽거나(신효), 어머니가 없거나(성환), 아내를 잃어버렸거나(정석) 어머니가 없고 또 나중에는 아버지마저 잃게 되는(가림) 등 가족 결합이 결렬된 환경에 놓여 있다. ‘성환’의 가족서사가 영화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지만 ‘성환’은 오이디푸스왕처럼 자기부정과 자기연민,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성환’의 아버지를 향한 콤플렉스는 ‘가림’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가림’은 ‘성환’을 느리고 길고 복잡한 러시안소설같다고 표현하는데, 마침 ‘가림’이 ‘성환’에게 빌려가는 것이 러시아 작가의 책이다. 영화에서는 그 책이 무슨 책인지 정확히 설명되지 않지만 ‘성환’의 대사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소설이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다. 「첫사랑」의 주인공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지나이다’가 자신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차에, ‘지나이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단순히 괴로워하거나 아버지를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의 경이로움을 깨닫는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 의식의 발현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경외의 영역의 어떤 감정으로 이동시키고 환치시킴으로써 아버지와의 수직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무의식적 사고행위이다. 그런 ‘블라디미르’와 ‘성환’의 동일시에 대한 암시는 아버지를 향한 복합층위의 감정을 억누르며 아버지와 결합된 가족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표면적으로 ‘성환’이 ‘신효’의 소설을 대신 쓰게 된 동기는, ‘신효’의 욕망에 대한 연민 때문인 것으로 비춰지지만, 그 행위는 ‘신효’라는 타자를 위한 순수한 연민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을 남기고 싶은 ‘성환’의 욕망으로 표현된다. ‘성환’의 그러한 글쓰기도 자기기만으로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성환’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버지는 가족 질서의 표상이자 권위이다. ‘성환’은 부계 권력이 장악하는 가족사회에서 수동적인 태도로 살아온 인물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 ‘성환’의 의식이 그의 내레이션을 통해 소환되는데, 자신에게는 ‘신효’가 갖고 있는 구체적인 욕망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욕망이 결렬되거나 소진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무화된 상태로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효’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신효’의 소설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데 무려 십 년이란 시간을 할애한 ‘성환’은 ‘신효’의 욕망을 경험하고 자기화하고, 완성하기에 이른다. ‘성환’은 자기자신의 이름을 내걸지 않음으로써 아버지와 철저하게 단절된다. 아버지와 단절됨으로써 ‘성환’은 제도 바깥으로 밀려난 이후 그 경계 너머에서 ‘성환’은 어떤 꿈을 꿀 것인가.

 

경계 이후, 말해지는 것들

 

  [조류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확신한 주체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은, ‘한비’가 남긴 메모(나 자신에 대한 확신은 있어요.)를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이 속한 사회 바깥에 귀속된다는 것에 대해 결정적 증언을 할 수 있는 인간에게 사회(가정, 국가, 제도 등)만큼 불분명한 것은 없다. ‘한비’의 운명 앞에 놓인 사회는 ‘한비’에게 별다른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한비’가 자신이 조류로 환태해야 하는 것을 운명으로 인식하고, 그에 따른 고통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의 과거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그때 그 순간, 우리가 아니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보고, 느끼고, 주고받을 수 없었던 것들이니까.

 

  역시 ‘정석’에게 ‘한비’가 남긴 메모인데, ‘한비’의 운명론적 사고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한비’가 비록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 ‘정석’과 공유한 바는 없지만, ‘한비’는 ‘정석’과의 시간을 행복했던 것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조류가 된 이후(조류를 꿈꾸는 시간 이후)’의 삶이 가치 있듯이 ‘아직 인간인 시간’ 또한 가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조류인간]은 의식적으로 운명 앞에 놓인 인물들의 표정과 삶의 양식을 응시한다. ‘정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사실은 자기자신의 운명을 위해) ‘정석’ 앞에 나타난 ‘소연’의 말(찾으려고 찾은 게 아니에요. 만나게 돼서 만난 거예요.)도 같은 차원의 것이다.

  [조류인간]에서는 어떤 의지보다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양태가 강하게 드러난다. 아내가 택한 운명을 확인하기 위해 떠난 ‘정석’의 도정 또한 ‘한비’가 수용했던 자신의 운명만큼이나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동력을 얻은 것이다. ‘정석’이 신발끈을 묶고 있는 모습이 [조류인간]과 [러시안 소설]에서 각각 한 번씩 노출되는데, 그 장면이 바로 ‘정석’ 또한 어떤 경계를 향해 자신의 몸을 끝없이 추동시키는 ‘정석’의 삶과 운명에 관한 미장센이다.

  [프랑스 영화처럼]의 표제작 <프랑스 영화처럼>이 신연식의 전작들을 겨냥해 어떤 메시지를 함의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 영화처럼 살든지, 이태리 연극처럼 살든지 러시안 소설처럼 살든지 그러한 선택의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수민’의 내레이션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기홍’이 있으니 자신은 ‘기홍’에게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운명이라는 것은 시간차를 달리해서 어딘가에서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 인간이 어떤 몸으로 어떤 경계에 서 있든 자신을 이끄는 운명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연식이 말해온 것, 그리고 계속 그로 인해 말해질 것들이 아닐까.

경계의 몸, 노바드 혹은 노 바디(No body)

  신연식이 창조한 많은 인물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육체를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육체를 견디지 못한 인물들은 육체를 버리기도 하고([프랑스영화처럼](2016)의 <타임 투 리브>의 ‘엄마’), 육체를 바꾸기도 한다.([조류인간]의 ‘한비’) 육체를 버리거나 육체를 바꾸려는 인물의 몸은 필연적으로 어떤 경계에 서게 된다. 그 경계에 따라서 몸의 양식이 결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조류인간]의 ‘소연’은 ‘정석’이 ‘한비’를 찾아가는 과정의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다. 그녀는 ‘한비’와 함께 온갖 고행을 견디며 이미 수술을 한번 받고 환태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실패했고, 그 이후 어쩔 수 없이 인간세계에서 살아왔다. ‘소연’은 그 15년의 시간이 지옥같았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으로 보통의 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 ‘소연’에겐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연’의 몸이 인간의 몸도 아니고, 조류의 몸도 아닌, 경계의 몸이기 때문이다. ‘소연’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인간세계 안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경계의 바깥을 꿈꿔왔다. [조류인간]에서 몸은 정신의 부속물로서의 물리적 육체가 아니라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므로 ‘소연’은 인간으로서 현존하는 공간을 부정하고 스스로 방외자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소연’의 절규에 생각을 바꾼 ‘이은호’는 ‘소연’에게 약물을 건네고 ‘소연’은 15년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약물을 받아 마신다. 그리고 ‘정석’이 아내와 대면하는 순간 ‘소연’은 크나큰 고통에 빠져든다. 하지만 '소연'의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마지막 씬에서 ‘소연’은 ‘정석’에게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꿈에서 이룰 수 없는 꿈들이 이뤄져서 꿈인 줄 알았다고 한다. 많은 꿈들이 이뤄진 꿈속에서조차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지각하는 것은 의식의 최종적 결렬을 뜻한다. ‘소연’은 스스로의 몸이 인간의 영역과 조류의 영역 중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하고 이뤄질 수 없는 꿈처럼 부유할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좋은 배우](신연식, 2005)에서 ‘수영’을 비롯한 배우들이 외부로부터 자신들에게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과 소통, 그리고 시행착오의 반복 과정을 통해 구하는 인물들이라면 [배우는 배우다]의 ‘오영’은 오직 자기 존재로서 질문을 파생시키고 그 답에 자기 존재로서 도달하려고 하는 인물이다. 두 영화는 비슷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답은 전혀 다른 층위로 산출된다.

  영화에서 ‘오영’의 몸은 현실과 연극,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든다. 신연식은 자신의 몸을 지배하지 못한 인물을 경계의 바깥으로 유목시킨다. 오프닝 씬에서 ‘오영’은 무대가 아닌, 무대 바깥에서 연극을 하고, 영화 촬영 씬에서도 영화적 공간과 현실적 공간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특히 연극 시퀀스는 관객에게 많은 혼란을 주는데, 관객들로 하여금 결국 어떤 서사도 믿지 못하게 한다. 오프닝 씬에서, ‘오영’이 마네킹을 세워두고 연기를 하는데, 이는 상대 배우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연기를 펼치는 ‘오영’의 왜곡된 연기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으며, ‘오영’이 실제로 겪었던 경험의 재현일 수도 있다. 신연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씬을 ‘오영’이 실제로 올랐던 무대와 연결시킨다. 무대 바깥의 공간이 무대 공간으로 전환되면서, ‘오영’의 몸은 역설적으로 무대 바깥으로 밀려난다.

  ‘오영’의 연극적 페르소나가 ‘오영’의 몸을 견디기엔 ‘오영’의 몸은 이미 트라우마로 과부화된 몸이다. 연극적 문법과 질서가 있고, 그 체제나 제도를 수용하는 것이 배우의 사명인데, ‘오영’은 자신이 견디지 못한 삶의 영역으로 극의 외연을 확대시키고, 극의 흐름을 변환시킨다. 배우의 몸, 배우의 페르소나로서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라, 좌절과 결락을 거친 인간의 몸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그 때의 무대는 이미 무대가 아니다. ‘나’와 타자, 무대와 객석, 삶과 연극의 경계에서 자신의 몸을 잃어버린 자가 빈 몸을 유목시키는 허상의 공간일 뿐이다.

  ‘오영’은 공연이 끝난 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오연희’와 대면한다. ‘오연희’는 자신의 재기를 망친 ‘오영’을 원망한다. 그런데 이 씬 또한 불확실한 경계를 내포하고 있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에 나누는 것으로 보이던 대화는, ‘오연희’에 의해 너무나 잘 아는 관계에서 나누는 대화의 양상으로 전환된다. ‘오영’ 또한 ‘오연희’의 대사를 자연스럽게 받으며 그녀에게 사과의 뜻을 전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오연희’는 페르소나를 전환시켜 ‘오영’과 함께 연기했던 배우의 모습으로 인사를 전하고(아까 좀 이렇게 하지 그랬어요.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다음에 기회 되면 이 작품 다시 해요.) ‘오영’에게서 멀어진다.

  무대 공간에서 배우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오영’은 무대 외의 공간에서 배우로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역설은 ‘오영’을 더욱 참담하게 만든다. 그리고 ‘오영’이 무대에서든, 무대 밖에서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영’은 연극을 통해 자신의 몸을 증명하고 싶어 했으나 결국 증명에 실패한다. 몸의 증명의 실패는 곧 운명의 실패다. 하지만 실패한 운명의 결과가 모두 죽음인 것은 아니다. [러시안 소설]에서 ‘정석’의 죽음을, <타임 투 리브>에서 ‘엄마’의 죽음을 실패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오영’의 운명이란 것이 연극에 투지(投地)된 어떤 가능성의 생이라고 할 때, 연극으로부터 격리된 ‘오영’의 운명은 증명의 실패로부터 귀결된 실패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영화는 허구다. 하지만 관객은 허구의 텍스트라는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구축된 실재의 서사를 본다. 영화가 거느리는 서사의 진위 여부나 현실적 재현 가능성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인물의 사랑 이야기 [뷰티 인사이드](백종열, 2015)도 로빈슨 표류기의 ‘화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마션](리들리 스콧, 2015)에서의 서사도 모두 다 ‘영화적 사실들’일 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화 내부세계의 경계를 확실히 지음으로써 영화 외부의 경험과 지식의 간섭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신연식은 허구와 사실, 영화와 실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영화가 허구라는 기본 전제를 의심하게 만든다. 알랭 바디우는 영화는 보이는 것의 확실함을 겉보기에 불확실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알랭 바디우, 알랭바디우의 영화, 한국문화사) 신연식의 영화에서는 확실한 사실의 근간마저도 불확실하다.

 

  경계와 탈경계의 서사

  [러시안 소설](2013)의 화소들, <조류인간>이나 <천년의 물약>, <귀 기울여 속삭이기> 등은 각각이 영화의 시퀀스이면서 동시에 극중 ‘신효’의 소설로 읽힌다. <통정> 또한 [러시안 소설]을 구성하는 한 화소이면서 ‘경미’의 소설이기도 하며, 동시에 ‘신효’의 소설이기도 하다.

 

  [러시안 소설]은 극중 인물이 쓴 소설과 영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인물들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영화 내부에 실재하는 서사인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허구적 사건인지 분별이 어렵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욥기의 구절과 낚시터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러한 수미상관의 방식은 영화의 시작과 끝의 경계 또한 명료하게 지정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같은 방식은 신연식의 영화에서 자주 노출된다. 신연식은 소설과 영화,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꿈, 시작과 끝 등을 정확하게 이분하여 그 지경을 구획하지 않는다. [배우는 배우다](신연식, 2013)에서는 ‘오영’이 출연하게 되는 영화가 <배우는 배우다>이고, [조류인간](신연식, 2015)은 ‘정석’의 소설 자체이다.

  박형서는 단편소설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에서 주인공 ‘부티’를 통해 장편소설, 『부티의 천년』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서사라 할 수 있다. 서사가 내부서사에 집중되지 않고 서사 밖의 또다른 서사를 겨냥하고 있는 것은, 자칫 소설이 스스로의 경계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소설이 아닌 것의 지점을 교묘하게 은폐한 서사의 운명은 그것이 다시 서사 본위의 것으로 귀환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러시안 소설]의 <조류인간> 또한 [조류인간]의 서사를 구체적으로 겨냥하지는 않지만 큰 얼개를 그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작품과 작품의 경계 구획이 희미해진다. 하지만 박형서가 『부티의 천년』이라는 (만들어질) 텍스트의 질서를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에서 규정하고 있는 데 반해 신연식은 <조류인간>에서 『조류인간』의 서사에 대해 많은 것들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조류인간]의 서사는 ‘정석’과 그의 아내 ‘한비’가 직접 겪은 일이자, 그 일을 소설로 쓴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영화가 관객에게 인양해온 서사를 소설로 환치시키는 것은 영화 내부에서 사실로 보여진 것을 단순히 픽션으로 각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각각의 텍스트에 메타적 호환성을 부여하여, 앙드레 말로가 이야기로서의 가능성 측면에서 영화와 소설의 강점을 이야기한 것처럼(이윤영 엮,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지성) 이야기의 동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이야기의 극대화된 동력은 신화 텍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신화 텍스트를 접하는 독자는 그것의 진위 여부를 논하지 않는다. 신화적 인물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발생했던 이적(異蹟)은 경험의 차원에서 수용되는 게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서 수용된다. 이때 신화의 서사는 일반화되고, 서사에 관여하는 초자연적 질서는 상징화된다. 신연식이 영화 내부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서사를 붕괴시키거나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말의 차원, 이야기의 차원에서 보여줄 수 없는(보여주지 않은) 것을, 경계의 차원에 양립시킨 텍스트와 텍스트 간의 장르적 간극과 그 간극에 소여되는 상상력을 통해 메우길 관객에게 권하는 것이다.

  도니 디드로는 소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를 통해 말과 소설의 경계를 보여주었다. 공교롭게도 말과 소설은 모두 ‘이야기’라는 동의어와 연결된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소설의 이야기가 영상언어로 뒤바뀐 서사적 구조물이다.

  신연식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이야기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때 장르는 이야기를 구속하지 않고 해방시킴으로써 장르와 장르가 호환되고, 작품과 작품이 교섭하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와 이야기는 변증의 작용을 거친다.

  [조류인간]에서 아내의 부재가 ‘정석’에게 어떤 결핍의 환경이라면, 아내를 찾아나서는 ‘정석’의 행동은 그 결핍을 해소하려는 시도이다. 그 팽팽한 길항은 영화 서사에서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자신의 눈앞에서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새로 환태한 아내와 대면한 상황에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그 이후 ‘정석’의 행적은 [러시안 소설]을 통해 밝혀진다. [러시안 소설]과 [조류인간]이 각각 다른 작품이면서도 그 경계의 구획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정석’이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려는 듯 목공소 일에 몰두하거나, 낚시로 소일을 하는 시간이, ‘정-반(正-反)’의 길항이 소강의 국면에 이르는 지점이라 할 때, ‘정석’이 아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수용한 뒤, 죽음이라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지점(중년 '신효'의 내레이션을 보면 '정석'의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분명치 않으나, 여러 정황을 비춰볼 때 그의 자살을 유추할 수 있다. )이 바로 '합(合)'의 지점이다.

 

 

 

  광주의 한 극장에서(광주극장이라고 해도 되겠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보았다. 통로를 사이에 둔 옆자리에는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계셨다. (할아버지가 아니면 어떡하지?) 그 할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가끔 어둠 속에서 눈빛을 빛내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이 어둠 속에 우리는 함께 앉아 있어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고양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어둠이다. 내 기억 속에 고양이는 늘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가끔 어둠인 채로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둠 속으로 지워지기도 했다.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고샅길에서 자주 발을 헛디뎠고 균형을 잃었다. 담장 위에 앉아있는 고양이의 실루엣이라도 보일라치면 놀라서 더 크게 휘청거렸다. 그런데 한 번도 넘어진 적은 없었다.(그랬던 것 같다고 믿는다.)

 

  사실 난 고양이라는 존재와 친밀하지 않다. 내가 자란 시골마을에서 고양이란, 악몽이나 추문의 가장자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마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고양이를 영물로 인식하는 태도가 고양이에 대한 금기를 만들어냈고, 그래서인지 우리 마을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집은 없었다.

 

  그래도!!

  고양이들은 있었다. 우리는 그 고양이들을 ‘도둑고양이’라고 불렀다. 도둑고양이를 둘러싼 괴소문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주술처럼 퍼져나갔다. 어두운 밤이 되면 고양이는 섬뜩한 이야기의 결말처럼 늘 내 뒤꽁무니를 따라왔다.

 

  고양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어른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지붕을 달릴 때면 우리집에서 항상 옆집 지붕으로 먼저 건너갔다가 그 다음 집으로 이동했다. 나도 모르게 생긴 습관이었다. 옆집으로 갔다가 다시 앞집으로 건너가는 식이었다. 한번은 그 규칙을 거슬러 뒷집을 먼저 밟아보았다. 뒷집은 평면형 지붕이었다. 빈민촌의 고양이들이 죄다 모여드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그것들은 서로를 부르고 뒹굴고 뒤엉켰다. 그것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빈민촌의 골목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어둠에 휘갈겨둔 낙서처럼 부유하다가 어느 집 담장에 스며들곤 했다. 고양이들이 뱉어놓은 울음이 뒤꿈치에서 바스락거렸다.

 

(내가 썼지만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소설 「달리-」에서도 고양이들이 등장하는데, 내가 어린 시절 느낀 고양이들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우리나라의 길고양이들과 달리, 일본과 대만의 길고양이들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나, 미짱, 루이, 쵸웨이……. 우리나라에서 길고양이는 그냥 고양이다. 종종 ‘고양이새끼’가 되고, ‘재수 없는 동물’이 되는 일도 다반사다.

 

어째서 우리는 항상 숨고 도망쳐야만 할까요.

 

 '1인칭 냐옹이 시점'의 내레이션 중 일부이다.

 

  일본에서 고양이는 건강과 행운을 상징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반대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칠 액운의 암시라도 되는 것처럼 고양이를 보면 놀라 진저리를 치고, 돌을 집어던지고,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 고양이들도 그걸 알기 때문에 항상 숨어 있거나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도쿄는 물론이고 니시나리와 같은 노숙자 마을에서도 고양이는 인간에게 쫓기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보호를 받으며 인간과 공존한다. 대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고양이를 향한 인간의 냉대와 저주 속에서 고양이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사진작가 김하연 씨는 10년 넘게 길고양이들을 보살펴왔다. 그가 사진을 찍는 이유가 가슴을 울린다. 인간과 고양이가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는.

  고양이보호협회의 분투도 눈물겹다. 콘크리트 더미에 갇힌 고양이를 구해달라는 구조 요청을 받고도, 바로 구조를 하지 못해 잠 한숨 못 잤다는 박선미 씨. 누가 그녀에게 그런 사명을 준 것인지, 내가 전혀 모르는 사실들을 견뎌온 자의 기도는 그래서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어느 상가 골목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고양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고양이를 발견하고 데려가는 사람이 약을 먹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고양이들을 그 일대에서 멸족시키기 위한 극약 같은 게 아니었을까.

 

  길에서 처음 만나 마음을 주고, 그 고양이(쵸웨이)가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죽을 때까지 그 고양이를 보살펴준 사람이 있다는 걸, 우리나라의 사람들은 몇이나 믿을까.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하고 떠나는 자의 마음은 고양이가 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

 

  그 때 어둠 속에서 휘청거릴 때 내게 손을 내민 자가 고양이였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이 어둠 속에 우리는 함께 있으니까, 라고 말하면서.

  나도 고양이가 되어보기로 한다.

  내가 그 골목에 앉아 울 때도 네가 지켜봐줬잖아. 기억나. 내가 다 울지 못하고 쓰러져 잠든 동안, 내가 다 울지 못한 울음을 네가 마저 울어줬잖아. 날이 밝으면 사라졌다가, 다시 어둠이 되면 이렇게 돌아오곤 했잖아.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중에서.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

 

 

  둥지를 떠난 새들은 둥지를 어떤 곳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새에게는 기억이란 게 없다. 만약 새들에게 기억이란 게 있었다면 새들은 자유롭게 허공을 날지 못했을 것이다. 새들에게 기억 대신 남겨진 것이 있다면 그건 어미가 틀었던 깃의 체온일 것이다. 그 따뜻한 감각이, 새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기억이라면 기억일 것이다.

 

 

  새 새끼들은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먹고 자란다. 둥지 안에서 아직 눈도 못 뜬 새끼들이 먹이를 물고 돌아온 어미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미의 발끝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 때문이다. 그 때 어미가 발끝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은 둥지에 얽혀있는 잔가지들이 아니라 허공의 끝자락 어디쯤이 아닐까. 자신이 더 이상 날아가도 되지 않는 허공. 그대로 나는 법을 잊고 추락해버려도 상관없는 절벽에서 어미는 다시 또 자신이 날갯짓을 해야만 하는 숙명을 깨닫는 것이다.

 

 

  ‘향숙’은 병원에서 가족들을 기다리면서 막내 ‘혜연’이 사다준 간식을 먹으며 (그것도 먹어선 안 되는 호빵) 행복해 한다. 하지만 당뇨 때문에 발목 절단 수술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어미새로 치자면 위태로운 허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입을 쩍쩍 벌리며 먹이를 기다리던 자식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다는 것.

 

 

  둘째 ‘금옥’이 들려주는 남편 이야기에 모두들 즐거워하지만 첫째 ‘혜영’만큼은 웃지 않는다. 이혼 후 금옥의 집에서 얹혀살고 있는 ‘혜영’은 아이들에게도 관심이 없고 허구한 날 술만 마시는 제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혜영이 금옥에게 날을 세우는 진짜 이유는, 자신의 결혼 실패로 인한 상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첫째와 둘째가 티격태격하면서 분위기는 어색해지고, 막내와 셋째에게까지 불똥이 튄다. ‘향숙’은 오랜만에 만난 딸들이 다투는 게 맘에 들지 않지만 그녀에게 낯선 풍경은 아닌 듯하다. 서로를 물고 뜯던 실랑이 소리가 잦아들고 병실 안은 침묵이 감돈다. 그리고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풍경과 섞이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철택’이다. 철택은 한평생 자신의 아내 ‘향숙’을 핍박해온,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장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셋째 ‘금희’의 아침을 차려주고, 그리고 딸을 위해 생선 고깃살을 발라주는 살뜰한 모습도 있다. 아내의 병문안에 가기 전 짧아서 빗을 필요가 없는 머리를 손질하기도 하고 (다시 손으로 헝클어버리긴 하지만) 병실에 와서 아내가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는, 이른바 ‘츤데레’다. 딸들의 대화에 끼어들진 않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은근히 웃기도 하고, 딸들과 손주들이 아무렇게나 벗어둔 점퍼를 개키기도 한다.

 

  철택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향숙도 그랬을까?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당신 때문에라도 더 견디고 싶어져요.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가 있어서 다행인 적이 있었을까.

 

 

  딸들이 비를 핑계로 가봐야겠다고 하자 ‘향숙’은 아쉬워한다. 가장 늦게 병실을 나온 사람은 ‘철택’이다. 철택이 아내에게 무엇인가를 건네는데, 검은 비닐봉투에 담겨 있어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아내가 먹고 싶어하는 고추장과 김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내를 위한 마음이 담겨 있으리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혜영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금옥이 돈봉투를 건네지만 철택은 한사코 받지 않는다. 철택이 풍족해서 딸이 준 용돈을 받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아직은 더 주고 싶은 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미새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동안, 그리고 새 새끼들이 어미새를 기다리는 동안, 밤낮으로 둥지를 지켜온 건 아비새니까. 새 새끼들이 기억하는 것은 어미새의 체온이지만, 그들은 분명 아비새의 그늘 아래에서 자랐으니까.

 

 

  혜영도, 금옥도, 그리고 금희와 혜연도 각자 견디고 사는 무게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갖고 있다. 새의 기억이 어미의 체온이 전부라면, 인간의 기억은 그 체온이 시작점이다. 그 체온으로부터 많은 기억들이 소환되고 재생된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 절벽 끝까지 내몰려 어둠과 추위와 두려움에 떨게 될 때, 자신의 기억의 근원, 그 따뜻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버드맨]의 진실게임

영화2016. 12. 25. 21:21

  <버드맨>진실게임이다.

 

  한때 잘 나가던 무비스타였던 리건(마이클 키튼)은 배우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브로드웨이 공연을 준비하는데, <버드맨>이 묻는 진실과 거짓의 문제는 그 지점부터 출발한다. 리건의 주위를 맴도는 목소리는 버드맨의 잔영이자, 리건의 분신이다. 그것은 리건이 완전하게 리건으로서 분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리건은 아내와 이혼을 했고, 그의 딸 샘(에마 스톤)은 약물중독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샘과의 관계 또한 원만하지 못하다.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들을 겪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리건이 화려했던 과거로부터 격리되는 것을 방해한다. 버드맨 수트를 벗고 싶은 욕망만큼이나 버드맨 4’를 찍거나 토크쇼에 나가고 싶은 욕망도 두드러진다. 처음에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배태된 버드맨의 목소리를 부정하던 리건은 그 목소리에 조금씩 반응하고, 그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리건은 샘과 진실게임을 벌이게 된다. 리건은 딸과의 진실게임에서 자신이 부정하고 외면했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 리건은 예술이 아닌, 자기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연극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잊힌 존재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얼핏 보면 이 장면의 진실게임의 패자는 리건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리건의 환부를 낱낱이 파헤친 샘 역시 진실게임의 허무한 결말 앞에서 아버지를 밀어내고 부정해 왔던 자기자신의 민낯을 확인하게 된다. 타인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면서 오해를 풀고 감동을 느끼는 게 진실게임의 요체임을 감안한다면, 리건이 처한 상황과 의지를 폄훼하는 샘은 진실게임의 암묵적 룰을 위반한 것인데, 샘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진실이 될 수 없다. 사실이 현실로서 구현된 사태(事態)라면, 진실은 그 사태의 구현을 위해 동원된 감정과 육체의 도정이다. 두 사람은 진실게임을 통해 사실 관계의 여부만 확인하려고 하지, 그 사실 너머의 진짜진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는다. 리건이 찾아낸 대마초도 샘의 영역에서 발견된 하나의 사실이지, 그것이 샘의 모든 것은 아니다.

 

 

  마이크(에드워드 노튼) 또한 <버드맨>의 진실게임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마이크는 대본의 거추장스러운 형식이나 지루한 의미 반복을 걷어내고 싶어 한다. 진짜 리얼한 삶을 무대에서 펼쳐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프리뷰 공연 당시 마이크는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술을 물로 바꿔치기한 리건을 질책하며, 소품이나 배우들의 연기가 모두 가짜라고 말하는데, 그만큼 마이크는 물질과 감정 모두 그대로 무대 위에서 재현되어야 한다고 믿고, 또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배우로서의 삶에 충실한 인물이다.

 

  하지만 무대 밖에서의 마이크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충실하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대는 현실과 대척점에 있는 공간이다. 마이크는 무대 공간의 리얼리티에 병적으로 집착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자신의 진심을 쉽게 내비치지 않는다. 마이크에게는 현실과 가상(무대)이 전도되기도 하는데, 자신이 추구하는 리얼리티가 작위적으로 세워진 무대 위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이크 역시 <버드맨>이 벌여놓은 진실게임의 패자인 것이다.

 

  <버드맨>의 진실게임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마이크는 샘과의 진실게임에서 언제나 거짓이 아닌 진실을 선택하면서 진실은 언제나 재미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곧 무대 밖에서도 마이크가 진짜, 또는 진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과 관계를 맺고 싶느냐는 샘의 질문에 마이크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그 이유를 묻는 샘에게 실제로 (성기가) 서지 않을 것 같아서라고 대답한다. 마이크는 자신의 결핍이나 콤플렉스를 왜곡하거나 은폐하지 않는다. 오히려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삶과 내면을 포박하고 있는 자신의 견갑들을 해체시킨다. 그러한 징후는 인터뷰 문제로 리건과 충돌하는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리건의 거짓말이긴 했지만 마이크는 리건의 불우한 유년 시절에 대해 연민하고 그를 위로하게 된다.

 

 

  한편, 리건은 자신의 분신인 버드맨과 진실게임을 벌이면서 모두가 잊어버린 퇴물 배우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환기시킨다. 하지만 버드맨과 분리되어 리건으로 존립하고 싶은 의지를 확고히 한다. ‘나 없이는 슬프고 이기적인 그저그런 배우일 뿐이라는 버드맨의 말을 버드맨 3’의 포스터를 던져버리는 행위로써 묵살해버린다.

 

 

  <버드맨>의 진실게임이 추동하는 결과값은 성장이다.

 

  마이크와 샘은 진실게임을 통해 자신들의 위증의 페르소나를 파기하고 각각의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리건도 비슷한 과정을 겪게 된다.

 

  의도치 않게 공연장 밖으로 나가게 된 리건은 자신을 기억하는 군중들과 만나게 된다. 군중들은 리건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지만 리건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리건이 보잘것없는 맨몸으로 공연장에 달려가는 것은 버드맨과의 결별을 시도하는 진짜 자기자신의 몸짓이다. 그리고 다음 날 리건은 버드맨으로서 마지막 비행을 즐기고, 스스로 버드맨과 완전히 결별한다.

 

  리건은 그 후 무대 위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증명하기에 이른다. 리건이 실제 총기를 자신에게 격발하는 것은 여러 가지 진실을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비평가 타바사가 지운 낙인을 겨냥한 것이면서, 연극에 모든 것을 내던진 배우로서의 선언이면서, ‘난장판또는 시궁창같은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올리기 위한 구원이기도 하다. 이것은 절대 게임이 아니며 오직 진실의 몫이다. 리건은 부리()를 잃은 대신 날개를 얻는다. (Bird)야말로 리건이 버드맨이 아닌 순수한 자기자신의 모습으로서 지향해 왔던 페르소나이다.

 

  새에게도, 인간에게도 비상은 벌칙이 아니다. 삶이고 꿈이고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