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광주의 한 극장에서(광주극장이라고 해도 되겠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보았다. 통로를 사이에 둔 옆자리에는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계셨다. (할아버지가 아니면 어떡하지?) 그 할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가끔 어둠 속에서 눈빛을 빛내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이 어둠 속에 우리는 함께 앉아 있어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고양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어둠이다. 내 기억 속에 고양이는 늘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가끔 어둠인 채로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둠 속으로 지워지기도 했다.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고샅길에서 자주 발을 헛디뎠고 균형을 잃었다. 담장 위에 앉아있는 고양이의 실루엣이라도 보일라치면 놀라서 더 크게 휘청거렸다. 그런데 한 번도 넘어진 적은 없었다.(그랬던 것 같다고 믿는다.)

 

  사실 난 고양이라는 존재와 친밀하지 않다. 내가 자란 시골마을에서 고양이란, 악몽이나 추문의 가장자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마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고양이를 영물로 인식하는 태도가 고양이에 대한 금기를 만들어냈고, 그래서인지 우리 마을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집은 없었다.

 

  그래도!!

  고양이들은 있었다. 우리는 그 고양이들을 ‘도둑고양이’라고 불렀다. 도둑고양이를 둘러싼 괴소문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주술처럼 퍼져나갔다. 어두운 밤이 되면 고양이는 섬뜩한 이야기의 결말처럼 늘 내 뒤꽁무니를 따라왔다.

 

  고양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어른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지붕을 달릴 때면 우리집에서 항상 옆집 지붕으로 먼저 건너갔다가 그 다음 집으로 이동했다. 나도 모르게 생긴 습관이었다. 옆집으로 갔다가 다시 앞집으로 건너가는 식이었다. 한번은 그 규칙을 거슬러 뒷집을 먼저 밟아보았다. 뒷집은 평면형 지붕이었다. 빈민촌의 고양이들이 죄다 모여드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그것들은 서로를 부르고 뒹굴고 뒤엉켰다. 그것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빈민촌의 골목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어둠에 휘갈겨둔 낙서처럼 부유하다가 어느 집 담장에 스며들곤 했다. 고양이들이 뱉어놓은 울음이 뒤꿈치에서 바스락거렸다.

 

(내가 썼지만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소설 「달리-」에서도 고양이들이 등장하는데, 내가 어린 시절 느낀 고양이들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우리나라의 길고양이들과 달리, 일본과 대만의 길고양이들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나, 미짱, 루이, 쵸웨이……. 우리나라에서 길고양이는 그냥 고양이다. 종종 ‘고양이새끼’가 되고, ‘재수 없는 동물’이 되는 일도 다반사다.

 

어째서 우리는 항상 숨고 도망쳐야만 할까요.

 

 '1인칭 냐옹이 시점'의 내레이션 중 일부이다.

 

  일본에서 고양이는 건강과 행운을 상징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반대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칠 액운의 암시라도 되는 것처럼 고양이를 보면 놀라 진저리를 치고, 돌을 집어던지고,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 고양이들도 그걸 알기 때문에 항상 숨어 있거나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도쿄는 물론이고 니시나리와 같은 노숙자 마을에서도 고양이는 인간에게 쫓기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보호를 받으며 인간과 공존한다. 대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고양이를 향한 인간의 냉대와 저주 속에서 고양이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사진작가 김하연 씨는 10년 넘게 길고양이들을 보살펴왔다. 그가 사진을 찍는 이유가 가슴을 울린다. 인간과 고양이가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는.

  고양이보호협회의 분투도 눈물겹다. 콘크리트 더미에 갇힌 고양이를 구해달라는 구조 요청을 받고도, 바로 구조를 하지 못해 잠 한숨 못 잤다는 박선미 씨. 누가 그녀에게 그런 사명을 준 것인지, 내가 전혀 모르는 사실들을 견뎌온 자의 기도는 그래서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어느 상가 골목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고양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고양이를 발견하고 데려가는 사람이 약을 먹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고양이들을 그 일대에서 멸족시키기 위한 극약 같은 게 아니었을까.

 

  길에서 처음 만나 마음을 주고, 그 고양이(쵸웨이)가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죽을 때까지 그 고양이를 보살펴준 사람이 있다는 걸, 우리나라의 사람들은 몇이나 믿을까.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하고 떠나는 자의 마음은 고양이가 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

 

  그 때 어둠 속에서 휘청거릴 때 내게 손을 내민 자가 고양이였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이 어둠 속에 우리는 함께 있으니까, 라고 말하면서.

  나도 고양이가 되어보기로 한다.

  내가 그 골목에 앉아 울 때도 네가 지켜봐줬잖아. 기억나. 내가 다 울지 못하고 쓰러져 잠든 동안, 내가 다 울지 못한 울음을 네가 마저 울어줬잖아. 날이 밝으면 사라졌다가, 다시 어둠이 되면 이렇게 돌아오곤 했잖아.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