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경계의 몸, 노바드 혹은 노 바디(No body)

  신연식이 창조한 많은 인물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육체를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육체를 견디지 못한 인물들은 육체를 버리기도 하고([프랑스영화처럼](2016)의 <타임 투 리브>의 ‘엄마’), 육체를 바꾸기도 한다.([조류인간]의 ‘한비’) 육체를 버리거나 육체를 바꾸려는 인물의 몸은 필연적으로 어떤 경계에 서게 된다. 그 경계에 따라서 몸의 양식이 결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조류인간]의 ‘소연’은 ‘정석’이 ‘한비’를 찾아가는 과정의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다. 그녀는 ‘한비’와 함께 온갖 고행을 견디며 이미 수술을 한번 받고 환태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실패했고, 그 이후 어쩔 수 없이 인간세계에서 살아왔다. ‘소연’은 그 15년의 시간이 지옥같았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으로 보통의 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 ‘소연’에겐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연’의 몸이 인간의 몸도 아니고, 조류의 몸도 아닌, 경계의 몸이기 때문이다. ‘소연’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인간세계 안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경계의 바깥을 꿈꿔왔다. [조류인간]에서 몸은 정신의 부속물로서의 물리적 육체가 아니라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므로 ‘소연’은 인간으로서 현존하는 공간을 부정하고 스스로 방외자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소연’의 절규에 생각을 바꾼 ‘이은호’는 ‘소연’에게 약물을 건네고 ‘소연’은 15년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약물을 받아 마신다. 그리고 ‘정석’이 아내와 대면하는 순간 ‘소연’은 크나큰 고통에 빠져든다. 하지만 '소연'의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마지막 씬에서 ‘소연’은 ‘정석’에게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꿈에서 이룰 수 없는 꿈들이 이뤄져서 꿈인 줄 알았다고 한다. 많은 꿈들이 이뤄진 꿈속에서조차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지각하는 것은 의식의 최종적 결렬을 뜻한다. ‘소연’은 스스로의 몸이 인간의 영역과 조류의 영역 중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하고 이뤄질 수 없는 꿈처럼 부유할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좋은 배우](신연식, 2005)에서 ‘수영’을 비롯한 배우들이 외부로부터 자신들에게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과 소통, 그리고 시행착오의 반복 과정을 통해 구하는 인물들이라면 [배우는 배우다]의 ‘오영’은 오직 자기 존재로서 질문을 파생시키고 그 답에 자기 존재로서 도달하려고 하는 인물이다. 두 영화는 비슷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답은 전혀 다른 층위로 산출된다.

  영화에서 ‘오영’의 몸은 현실과 연극,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든다. 신연식은 자신의 몸을 지배하지 못한 인물을 경계의 바깥으로 유목시킨다. 오프닝 씬에서 ‘오영’은 무대가 아닌, 무대 바깥에서 연극을 하고, 영화 촬영 씬에서도 영화적 공간과 현실적 공간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특히 연극 시퀀스는 관객에게 많은 혼란을 주는데, 관객들로 하여금 결국 어떤 서사도 믿지 못하게 한다. 오프닝 씬에서, ‘오영’이 마네킹을 세워두고 연기를 하는데, 이는 상대 배우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연기를 펼치는 ‘오영’의 왜곡된 연기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으며, ‘오영’이 실제로 겪었던 경험의 재현일 수도 있다. 신연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씬을 ‘오영’이 실제로 올랐던 무대와 연결시킨다. 무대 바깥의 공간이 무대 공간으로 전환되면서, ‘오영’의 몸은 역설적으로 무대 바깥으로 밀려난다.

  ‘오영’의 연극적 페르소나가 ‘오영’의 몸을 견디기엔 ‘오영’의 몸은 이미 트라우마로 과부화된 몸이다. 연극적 문법과 질서가 있고, 그 체제나 제도를 수용하는 것이 배우의 사명인데, ‘오영’은 자신이 견디지 못한 삶의 영역으로 극의 외연을 확대시키고, 극의 흐름을 변환시킨다. 배우의 몸, 배우의 페르소나로서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라, 좌절과 결락을 거친 인간의 몸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그 때의 무대는 이미 무대가 아니다. ‘나’와 타자, 무대와 객석, 삶과 연극의 경계에서 자신의 몸을 잃어버린 자가 빈 몸을 유목시키는 허상의 공간일 뿐이다.

  ‘오영’은 공연이 끝난 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오연희’와 대면한다. ‘오연희’는 자신의 재기를 망친 ‘오영’을 원망한다. 그런데 이 씬 또한 불확실한 경계를 내포하고 있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에 나누는 것으로 보이던 대화는, ‘오연희’에 의해 너무나 잘 아는 관계에서 나누는 대화의 양상으로 전환된다. ‘오영’ 또한 ‘오연희’의 대사를 자연스럽게 받으며 그녀에게 사과의 뜻을 전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오연희’는 페르소나를 전환시켜 ‘오영’과 함께 연기했던 배우의 모습으로 인사를 전하고(아까 좀 이렇게 하지 그랬어요.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다음에 기회 되면 이 작품 다시 해요.) ‘오영’에게서 멀어진다.

  무대 공간에서 배우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오영’은 무대 외의 공간에서 배우로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역설은 ‘오영’을 더욱 참담하게 만든다. 그리고 ‘오영’이 무대에서든, 무대 밖에서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영’은 연극을 통해 자신의 몸을 증명하고 싶어 했으나 결국 증명에 실패한다. 몸의 증명의 실패는 곧 운명의 실패다. 하지만 실패한 운명의 결과가 모두 죽음인 것은 아니다. [러시안 소설]에서 ‘정석’의 죽음을, <타임 투 리브>에서 ‘엄마’의 죽음을 실패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오영’의 운명이란 것이 연극에 투지(投地)된 어떤 가능성의 생이라고 할 때, 연극으로부터 격리된 ‘오영’의 운명은 증명의 실패로부터 귀결된 실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