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극단적으로 말해 영화는 허구다. 하지만 관객은 허구의 텍스트라는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구축된 실재의 서사를 본다. 영화가 거느리는 서사의 진위 여부나 현실적 재현 가능성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인물의 사랑 이야기 [뷰티 인사이드](백종열, 2015)도 로빈슨 표류기의 ‘화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마션](리들리 스콧, 2015)에서의 서사도 모두 다 ‘영화적 사실들’일 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화 내부세계의 경계를 확실히 지음으로써 영화 외부의 경험과 지식의 간섭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신연식은 허구와 사실, 영화와 실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영화가 허구라는 기본 전제를 의심하게 만든다. 알랭 바디우는 영화는 보이는 것의 확실함을 겉보기에 불확실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알랭 바디우, 알랭바디우의 영화, 한국문화사) 신연식의 영화에서는 확실한 사실의 근간마저도 불확실하다.

 

  경계와 탈경계의 서사

  [러시안 소설](2013)의 화소들, <조류인간>이나 <천년의 물약>, <귀 기울여 속삭이기> 등은 각각이 영화의 시퀀스이면서 동시에 극중 ‘신효’의 소설로 읽힌다. <통정> 또한 [러시안 소설]을 구성하는 한 화소이면서 ‘경미’의 소설이기도 하며, 동시에 ‘신효’의 소설이기도 하다.

 

  [러시안 소설]은 극중 인물이 쓴 소설과 영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인물들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영화 내부에 실재하는 서사인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허구적 사건인지 분별이 어렵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욥기의 구절과 낚시터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러한 수미상관의 방식은 영화의 시작과 끝의 경계 또한 명료하게 지정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같은 방식은 신연식의 영화에서 자주 노출된다. 신연식은 소설과 영화,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꿈, 시작과 끝 등을 정확하게 이분하여 그 지경을 구획하지 않는다. [배우는 배우다](신연식, 2013)에서는 ‘오영’이 출연하게 되는 영화가 <배우는 배우다>이고, [조류인간](신연식, 2015)은 ‘정석’의 소설 자체이다.

  박형서는 단편소설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에서 주인공 ‘부티’를 통해 장편소설, 『부티의 천년』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서사라 할 수 있다. 서사가 내부서사에 집중되지 않고 서사 밖의 또다른 서사를 겨냥하고 있는 것은, 자칫 소설이 스스로의 경계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소설이 아닌 것의 지점을 교묘하게 은폐한 서사의 운명은 그것이 다시 서사 본위의 것으로 귀환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러시안 소설]의 <조류인간> 또한 [조류인간]의 서사를 구체적으로 겨냥하지는 않지만 큰 얼개를 그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작품과 작품의 경계 구획이 희미해진다. 하지만 박형서가 『부티의 천년』이라는 (만들어질) 텍스트의 질서를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에서 규정하고 있는 데 반해 신연식은 <조류인간>에서 『조류인간』의 서사에 대해 많은 것들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조류인간]의 서사는 ‘정석’과 그의 아내 ‘한비’가 직접 겪은 일이자, 그 일을 소설로 쓴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영화가 관객에게 인양해온 서사를 소설로 환치시키는 것은 영화 내부에서 사실로 보여진 것을 단순히 픽션으로 각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각각의 텍스트에 메타적 호환성을 부여하여, 앙드레 말로가 이야기로서의 가능성 측면에서 영화와 소설의 강점을 이야기한 것처럼(이윤영 엮,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지성) 이야기의 동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이야기의 극대화된 동력은 신화 텍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신화 텍스트를 접하는 독자는 그것의 진위 여부를 논하지 않는다. 신화적 인물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발생했던 이적(異蹟)은 경험의 차원에서 수용되는 게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서 수용된다. 이때 신화의 서사는 일반화되고, 서사에 관여하는 초자연적 질서는 상징화된다. 신연식이 영화 내부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서사를 붕괴시키거나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말의 차원, 이야기의 차원에서 보여줄 수 없는(보여주지 않은) 것을, 경계의 차원에 양립시킨 텍스트와 텍스트 간의 장르적 간극과 그 간극에 소여되는 상상력을 통해 메우길 관객에게 권하는 것이다.

  도니 디드로는 소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를 통해 말과 소설의 경계를 보여주었다. 공교롭게도 말과 소설은 모두 ‘이야기’라는 동의어와 연결된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소설의 이야기가 영상언어로 뒤바뀐 서사적 구조물이다.

  신연식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이야기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때 장르는 이야기를 구속하지 않고 해방시킴으로써 장르와 장르가 호환되고, 작품과 작품이 교섭하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와 이야기는 변증의 작용을 거친다.

  [조류인간]에서 아내의 부재가 ‘정석’에게 어떤 결핍의 환경이라면, 아내를 찾아나서는 ‘정석’의 행동은 그 결핍을 해소하려는 시도이다. 그 팽팽한 길항은 영화 서사에서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자신의 눈앞에서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새로 환태한 아내와 대면한 상황에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그 이후 ‘정석’의 행적은 [러시안 소설]을 통해 밝혀진다. [러시안 소설]과 [조류인간]이 각각 다른 작품이면서도 그 경계의 구획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정석’이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려는 듯 목공소 일에 몰두하거나, 낚시로 소일을 하는 시간이, ‘정-반(正-反)’의 길항이 소강의 국면에 이르는 지점이라 할 때, ‘정석’이 아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수용한 뒤, 죽음이라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지점(중년 '신효'의 내레이션을 보면 '정석'의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분명치 않으나, 여러 정황을 비춰볼 때 그의 자살을 유추할 수 있다. )이 바로 '합(合)'의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