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고흐가 죽기 이틀 전에 그린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후에도 고흐는 예닐곱 작품을 더 그렸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이 작품을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작품이 고흐가 바라본 자신의 마지막 생처럼 느껴진다.

 

 (작품에 대한 사실 정보가 바뀌어도 작품에 대한 이미지는 잘 바뀌지 않는다.)

   밀밭의 황금빛은 유독 휘황해 보인다. 밀밭 자체가 주는 풍요의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밀밭의 들머리에 닿아 있는 하늘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인다. 하늘은 보랏빛인데 캔버스 상단의 경계는 까맣다. 하늘은 차라리 죽음에 가깝다. 그러니까 풍요로운 밀밭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생명 같다. 결코 풍요로운 일생을 보내지 않았던 고흐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대리적 생명으로서 대자연을 작동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욕망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멈추지 않는다. 까마귀, 날아간다. ‘날아오는’ 게 아니다. 까마귀의 날개의 방향을 보면 분명 그 날갯짓은 저물어가는 하늘, 즉 죽음의 방향 쪽이다. 까마귀는 풍요로운 밀밭을 보지 못한다. 까마귀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저 하늘뿐이다. 고흐는 밀밭 사이로 난 세 갈래 길 중에서 과연 어떤 길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 길이 어떤 길이든 죽음과 맞닿은 길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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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이후

소품2023. 7. 8. 11:01

  헤어지는 것도 다정했으면 좋겠다.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이 가능해졌으면 좋겠다. 헤어지고 나서도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충분히 그리운 사람이었다. 그리움의 목적이 꼭 만남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멀어지기 위해 그리워할 수도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를 받아들이면서, 그 거리를 애써 좁히려 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를 대하던 자신의 모습과 마음과 태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굳이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서도 우리는 충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그런 모습들을 좋아했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런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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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원에서는 눈이 내리는 소리가 모든 언어를 잠식한다. 내리는 눈이 곧 언어다. 그래서 설원의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동안에는 되도록 말을 아낀다. 눈은 응결된 빛의 언어다. 눈이 녹지 않는 한 그 빛의 언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설원에서는 그 언어를 굳이 해독할 필요가 없었다. 설원의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것을 보는 것으로, 내리는 눈을 맞는 것으로, 눈밭을 걷는 것으로 그 언어를 이해했다.

 

  눈은 내렸다가 그치고, 언제 멎었는지도 모르게 다시 내리기를 반복한다. 이곳에서도 시간은 흐르지만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눈이 내리는 속도가 시간이 흐르는 속도다. 눈이 매서운 바람과 함께 퍼부어질 때는 시간의 유속을 가늠할 수가 없다. 눈이 바람 없이 잔잔하게 흩날릴 때는 시간의 흐름마저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설원에는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 있다. 그 나무를 구체적으로 이르는 이름은 없었다. 어떤 이는 그 나무를 얼어붙은 자의 뒷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이는 새로운 생명의 그늘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이는 푸른 피의 정령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설원의 나무를 사람이나 생명과 관련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나무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나무에서 눈의 결정들이 열린다고 믿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눈이 눈밭에 섞이도록 종종 나뭇가지를 건드리곤 했다. 눈밭의 결정들이 다시 떠올라 허공에서 무수한 눈발로 열린 뒤에 다시 지상으로 쏟아져 내린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나무를 베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조차 쉽게 꺾지 않았다.

 

 

- 『겨울 속으로』(마카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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