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브루노 마스(Bruno Mars)가 부른 <Count On Me>라는 노래가 있다. 당신들은 언젠가 이 노래를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다.

 

If you ever find yourself stuck in the middle of the sea

만약 네가 바다 한가운데에 갇히게 된다면

I'll sail the world to find you

나는 너를 찾기 위해 이 세상을 항해할 거야.

If you ever find yourself lost in the dark and you can't see

만약 네가 어둠 속에 길을 잃고 눈이 먼다면

I'll be the light to guide you

나는 너를 안내하는 빛이 될 거야.

 

  많은 친구를 만났고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다. 나는 그들에게 항상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주지 못할 때는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믿지 않을 때에도 나는 그들의 텅 빈 손만은 믿었다. 악수를 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나를 해할 무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도 그랬다. 친절한 손, 세심한 손, 그러나 텅 비어 있는 손, 무해하지만 간혹 무관한 손, 가끔 무례한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베드로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던처럼. 겨울 내내 몸져누워 있던 나는 그렇게 일어났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실패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실패이기도 하니까.* 실수하지 않는 손, 실패하지 않는 손을 갖고 싶었다. 나의 빛이었던 것들이 나를 그렇게 살게 했다. 당신들도 그 빛들 중의 하나였다.

  나는 바다의 온도를 모른다. 아주 무서운 것들은 깊고 캄캄한 곳에 있다. 그곳에 반짝이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빛이 된 그들의 눈동자이다. 나는 그들을 찾기 위해 바다를 항해한 적도 없고, 뭍으로 안내해주지도 못했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기를 수 없는 것을 기르려면

물속에 잠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려면**

 

 한 번도 만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 만난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텅 빈 손을 내밀어주고 싶었다. 낭떠러지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의 아이를 끌어올리는 심정으로. 얘들아, 나의 손을 믿어.

 

You can count on me like 1, 2, 3

I'll be there

너는 나를 믿을 수 있어 ‘1, 2, 3’처럼

나는 거기 있을 거야

이렇게 밝게 노래해줄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유일한 빛이 될 수 있는 것처럼.

 

I'll never let go

Never say goodbye

나는 결코 너를 떠나보내지 않을 거야

결코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나도 너희들의 친구란다. , 나의 손을 잡아. 이제라도, 이렇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들도 그럴 것이다. 내가 아는 당신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니까.

 

* 나희덕, [저 불빛들을 기억해](하늘바람별)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아픈 것은 그들의 실패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내 사랑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 안희연, <나의 투쟁>, [여름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이별의 그늘(윤상)

노래2019. 2. 18. 13:32

 

 

문득 돌아보면,

 돌아보면 있다.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내가 있다. 다시는 임용고시 따위는 보지 않을 거라고 누간가의 어깨를 붙잡고 울던 내가 있다. 그 때 그는 내게 그랬다. 이렇게 울 거면 다시 해. 그러나 나는 그 뒤로 임용고시를 치르지 않았다.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돌아보면 아직도 나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있다. 몇 번이고 다짐하고 그 다짐을 스스로 허무는 나를 돌아보는 내가 있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럴 거면 다시 써. 그러나 나는 어떤 시도 쉽게 완성하지 못했다. 

 몇 년 전 어렵게 시를 완성해온 한 아이에게 이렇게 쓸 거면 쓰지 마,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주아주 나중에 그 아이가 한 시간 가까이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늦게서야 돌아보니 아직도 울고 있는 그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천천히 내게 다가와 왜 아직 울고 있는 거냐고 되묻는다. 아, 울고 있는 건 나였구나. 

 

 문득 돌아보면 같은 자리지만,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번지다 만 그늘처럼. 그 그늘에서 시간은 고이고 늘 같은 자리에 서있으면서 난 아주 먼 길을 떠나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으며 또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면 아버지가 서 있다. 아버지는 돌아보는 일에도 서툴다. 한 손은 주머니에 찌른 채지만 나머지 한 손은 만질 것도, 따로 둘 데도 없어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아버지는 주로 마당가에 서 있다. 아버지는 내가 오는 기척을 느끼지만 바로 돌아보지는 않는다. 마치 다른 중요한 볼 일이 있는 것처럼, 마침 삭정이처럼 비어져 나온 손으로 허방을 더듬는다. 아주 먼 길을 떠나온 사람처럼,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만날 수 없었지, 한번 어긋난 후,

 

 어떤 아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만나게 해드릴게요. 한번쯤 만나보면 좋을 것 같은 아이들은 여럿 있었지만, 나만의 의지만으로, 나 혼자 시간과 노력을 들여 움직여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해서 만날 필요가 있을까. 물론 그 아이는 내게 선의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 아이가 나와 만나게 해줄 수 있는 또다른 무리들은 나와 무척 다정했던 사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고, 거기서 더 시간이 지나, 마치 이미 어긋나버린 사이가 돼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다시 만나기 위해선 누군가 지난 일에 대해 사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다만 시간이 흐른 것뿐인데도 말이다.

 

 나의 기억에서만 살아 있는 먼 그대,

 

 뇌에는 감정과 객관적 사실을 다루는 뇌가 각각 따로 있다고 한다. 전자의 주체는 해마와 편도체이고 후자의 주체는 전두전야이다. 이 두 개의 뇌는 상황에 따라서 주종관계가 뒤바뀌는데, 해마와 편도체의 작용이 활발해지면 사람은 객관적 사실을 외면한 채 감정적으로 변하게 되고, 전두전야의 작용이 활발해지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이성적 평가를 통해 얼마든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나의 기억에서만 살아 있는 먼 그대’가 있다고 하자. ‘나’는 얼핏 해마와 편도체의 작용에 압도당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별이 슬프고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사실 전두전야가 주도적으로 작동하여 자신의 기억 속에서 ‘객관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슬픔이나 안타까움의 정서가 깔려 있지만, ‘나’는 그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되도록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더 객관적으로 위치시켜 ‘먼 그대’라고 인식하고 있다. 


 더 오래 살아 있길 바란다. 더 멀리 떨어진 채로. 영영 객관적인 기억 속에서.   

 

 난 끝내 익숙해지겠지, 그저 쉽게 잊고 사는걸

 

 그러나 끝내는 익숙해진다. 먼 산까지 아지랑이 기어오르는 봄날부터, 눈의 결정들이 허공을 가득 메우는 겨울날까지, 시간이 시간을 부르고, 시간이 시간을 잊고, 다시 시간이 시간으로 되살아나는 동안, 나도 서성거리다가 떠난 사람이 누구였는지 잊고, 몰래 울고 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 시를 잊고, 나의 기억에서만 살아 있던 사람을 잊는다. 아버지를 잊고,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까지 잊는다. 내가 아주 오래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듯이, 우왕좌왕, 허둥지둥, 아등바등했던 모든 몸짓을 잊는다.  
  


  또 함께 나눈 모든 것도 그만큼의 허전함일 뿐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떤 만남을 준비할까

 하지만 기억해줘,

 지난 얘기와 이별 후에 비로소 눈뜬 나의 사랑을

 
 

 나는 안개를 이해하지 못했다, 라고 시작하는 시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사는 시골마을에는 아침안개가 늘 자욱했다. 안개 속을 눈이 먼 것처럼 더듬더듬 걸어가곤 했다. 느릿느릿. ‘더듬더듬’과 ‘느릿느릿’은 그 때의 내 속도였다. 짙은 안개가 걷히고 나는 눈을 떴다. 안개 바깥으로 나오게 된 것을 안개를 이해한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 허둥지둥했다. 아등바등 사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안개는 아직도 등 뒤에서 일렁였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돌아보면, 내가 아직 같은 자리에 있을까봐 두려웠다. 그 아이가 울고 있고, 아버지가 아직 서성거리고 있고, 아무도 용서하지 못한 채로,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한 채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일까봐 돌아볼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있었고, 눈앞에 분명 누군가 있었는데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가 내게 천천히 다가와 내 얼굴을 만지며 이렇게 말한다.

 

 왜 아직도 울고 있느냐고.

 

 나는 아무하고도 헤어지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무한궤도 1[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의 타이틀은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였다. 그 노랫말 중에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라는 구절이 있다. 1989년에 나온 앨범이지만 난 그 때만 해도 무한궤도에 관심이 없었다.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아, 앨범 타이틀보다 먼저 더 유명해진 <그대에게>라는 노래를 겨우 알고 있을 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내 방이라는 게 생겼고(동생과 같이 쓰긴 했지만) 나는 마이마이카세트를 엄청난 노력 끝에 얻게 되었다. 집에 돌아오면 미니카세트를 끼고 누워 라디오를 듣는 게 일이었다. 그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프로그램은 정오의 희망곡이었다. 정오가 되면 가방 속에 숨겨둔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카세트를 가지고 다니다 선생에게 걸리면 빼앗겼다.)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4교시가 끝나면(1240분쯤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얼른 B면으로 돌려 다시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 시절의 나는 그것이 불편해서 리버스 녹음이 된다고 하는 정말로 말로만 들었다. - SONY가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 녹음된 프로그램은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들었다. 51번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다. 30분 가까이 버스를 타야 정류장에 내릴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시간을 견디는 건 고역이었다. 하지만 정오가 한참 지나 듣는 정오의 희망곡이 있어서 괜찮았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난다. DJ가 누구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성우였던 걸로 기억한다. - 그 날 DJ는 비오는 날 와이퍼 소리가 좋다고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앞유리에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마침 버스도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와이퍼가 흔들리는 걸 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이지 않았다. 겨우 옆 차창에 빗물이 맺히는 걸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싱숭생숭했다고 할까? - DJ싱숭생숭이란 표현을 했던 것 같다. - 당시의 내가 그 이상한 기분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답답해 했다는 것도 기억난다. 신해철의 목소리는 비가 내리는 날, 땅바닥에 낮게 깔리는 안개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안개가 흩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걸어간 아침의 길 끝에 (정류장 부근을 나는 길 끝이라고 불렀다.) 나보다 먼저 와서 딛고 서 있는 바람 같은 느낌이었다. 발목이 시리도록 안개가 서성이고, 바람이 허공을 흔들어 고여 있던 물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버스는 정류장마다 멈춰섰지만 난 느끼지 못했다. 다만 빗방울들이 흘러내리면서 나에게 써 보인 말들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시선을 옮겨 옆의 차창을 바라보면 모르는 이름이 쓰여 있기도 하고,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그 이름과 얼굴이 질문일 수도 있고 그것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히)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 동안,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살았다고) 최소한 30분보다는 더 긴 시간이 말이다. 그런데 아깝지 않았다. 끝나가고 있다는 건 상실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끝도 안 보이는 생이 낯선 질문 앞에서 어물쩍 흘러가주는 것이 고마웠다. 신해철의 노래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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