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무한궤도 1[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의 타이틀은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였다. 그 노랫말 중에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라는 구절이 있다. 1989년에 나온 앨범이지만 난 그 때만 해도 무한궤도에 관심이 없었다.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아, 앨범 타이틀보다 먼저 더 유명해진 <그대에게>라는 노래를 겨우 알고 있을 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내 방이라는 게 생겼고(동생과 같이 쓰긴 했지만) 나는 마이마이카세트를 엄청난 노력 끝에 얻게 되었다. 집에 돌아오면 미니카세트를 끼고 누워 라디오를 듣는 게 일이었다. 그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프로그램은 정오의 희망곡이었다. 정오가 되면 가방 속에 숨겨둔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카세트를 가지고 다니다 선생에게 걸리면 빼앗겼다.)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4교시가 끝나면(1240분쯤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얼른 B면으로 돌려 다시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 시절의 나는 그것이 불편해서 리버스 녹음이 된다고 하는 정말로 말로만 들었다. - SONY가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 녹음된 프로그램은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들었다. 51번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다. 30분 가까이 버스를 타야 정류장에 내릴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시간을 견디는 건 고역이었다. 하지만 정오가 한참 지나 듣는 정오의 희망곡이 있어서 괜찮았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난다. DJ가 누구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성우였던 걸로 기억한다. - 그 날 DJ는 비오는 날 와이퍼 소리가 좋다고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앞유리에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마침 버스도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와이퍼가 흔들리는 걸 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이지 않았다. 겨우 옆 차창에 빗물이 맺히는 걸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싱숭생숭했다고 할까? - DJ싱숭생숭이란 표현을 했던 것 같다. - 당시의 내가 그 이상한 기분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답답해 했다는 것도 기억난다. 신해철의 목소리는 비가 내리는 날, 땅바닥에 낮게 깔리는 안개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안개가 흩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걸어간 아침의 길 끝에 (정류장 부근을 나는 길 끝이라고 불렀다.) 나보다 먼저 와서 딛고 서 있는 바람 같은 느낌이었다. 발목이 시리도록 안개가 서성이고, 바람이 허공을 흔들어 고여 있던 물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버스는 정류장마다 멈춰섰지만 난 느끼지 못했다. 다만 빗방울들이 흘러내리면서 나에게 써 보인 말들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시선을 옮겨 옆의 차창을 바라보면 모르는 이름이 쓰여 있기도 하고,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그 이름과 얼굴이 질문일 수도 있고 그것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히)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 동안,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살았다고) 최소한 30분보다는 더 긴 시간이 말이다. 그런데 아깝지 않았다. 끝나가고 있다는 건 상실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끝도 안 보이는 생이 낯선 질문 앞에서 어물쩍 흘러가주는 것이 고마웠다. 신해철의 노래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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