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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꿈꾸는 것들

  서사는 기본적으로 욕망을 함의한다. 욕망은 인간 본위의 것이고, 세계의 갈등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러시안 소설]에서도 욕망은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동력이다. ‘신효’의 욕망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순수하고 내적인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글쓰기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대타자적인 욕망이 강하다. ‘신효’의 욕망은 소설 본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 바깥에 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반영 행위이다. 즉, 자기자신과 타인과의 거리, 세계적 질서와의 관계를 파악한 이후, 임의의 지점에 자기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문제적 상황에 대한 자신의 대응 방식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결국 글쓰기의 실패에 좌절을 겪는 ‘신효’에 대한 구원은 ‘김기진’이라는 권위의 표상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효’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효’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자기기만적 글쓰기를 계속해 나간다. 그 결과 ‘신효’는 극심한 좌절을 경험한다. ‘재혜’가 건네준 약물을 받아 마신 ‘신효’는 27년이라는 시간 동안 잠을 자게 된다. 삶의 상태도 아니고, 죽음의 상태도 아닌 채로 잠을 자는 동안 ‘신효’가 이루지 못했던 꿈이 이루어진다. ‘신효’가 굉장한 소설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신효’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신효’가 여전히 자기기만의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효’는 영화 속 현실을 살고 있지만, 그 현실이 자신이 쓰지 않은 소설로 만들어진 현실이므로, 주체의 몸은 소거된다. 소거된 몸의 각성은 ‘신효’로 하여금 자기기만이라는 또다른 꿈으로부터의 각몽을 위해 ‘성환’을 찾아나서게 한다.

  한편 문단의 비주류로서 콤플렉스를 안고 있던 ‘경미’는 이민을 통해 자신의 욕망이 결렬된 경계 밖으로 자신의 몸을 최대한 이격시킨다. 몸을 이격(또는 은폐)시킨다는 점에서는 ‘성환’과 비슷하지만 ‘성환’이 ‘신효’의 몸을 빌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신효’가 욕망의 충동을 제어하지 않고 그대로 표출시킨다면, ‘성환’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한다. ‘성환’은 ‘신효’ 작품의 문제점들을 짚어낼 만큼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그것을 자신의 작품을 쓰는 데 할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효’가 새롭게 구상한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한 소설가 아들이 아버지와 비교되는 게 싫어서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의 작품을 개작한다. 아들은 자신이 쓴 이야기가 훨씬 더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아들은 자살하고 아버지의 명성은 더 올라간다.

 

  또한 ‘신효’가 ‘경미’에게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성환’의 특별한 정황이 포착된다. ‘신효’가 유명한 소설가의 아들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하자, ‘경미’는 그것이 ‘성환’의 이야기라는 걸 금방 알아차린다. ‘경미’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므로 그 이야기를 모티프로 소설을 쓰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한다. ‘성환’이 아버지 ‘김기진’의 작품을 대신 썼다는 확언은 영화에서 이뤄지지 않으나, ‘신효’의 소설 내용과, ‘성환’이 후반부에서 ‘신효’의 소설을 개작한 주인공임이 밝혀지는 것으로 그 확언은 대체된다. 그리고 내내 관찰자의 위치에 서 있던 ‘성환’이 후반부에는 서사의 확실한 중심으로 이동하게 된다.

  ‘재혜’는 ‘성환’을 모델로 쓴 ‘신효’의 작품이 마치 그리스비극같다며 감탄한다. 그리스비극에의 비유는 사실 ‘신효’의 소설 면면에 대한 ‘재혜’의 인상평가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리스비극이 함의하는 비극성은 [러시안 소설]의 하중을 견디고 있는 요체이다.

  비극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물리적 고통에 대한 임상적 반응을 초월한 가역 반응을 통찰한다. 그리스비극의 대표작 격인 「오이디푸스왕」에서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바로 자기자신이고, 자신이 어머니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겪게 되는 혼란이 자기부정과 자해 또는 자살로 이어진다. [러시안 소설]의 인물들은 부모가 동반자살하여 죽거나(신효), 어머니가 없거나(성환), 아내를 잃어버렸거나(정석) 어머니가 없고 또 나중에는 아버지마저 잃게 되는(가림) 등 가족 결합이 결렬된 환경에 놓여 있다. ‘성환’의 가족서사가 영화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지만 ‘성환’은 오이디푸스왕처럼 자기부정과 자기연민,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성환’의 아버지를 향한 콤플렉스는 ‘가림’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가림’은 ‘성환’을 느리고 길고 복잡한 러시안소설같다고 표현하는데, 마침 ‘가림’이 ‘성환’에게 빌려가는 것이 러시아 작가의 책이다. 영화에서는 그 책이 무슨 책인지 정확히 설명되지 않지만 ‘성환’의 대사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소설이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다. 「첫사랑」의 주인공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지나이다’가 자신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차에, ‘지나이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단순히 괴로워하거나 아버지를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의 경이로움을 깨닫는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 의식의 발현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경외의 영역의 어떤 감정으로 이동시키고 환치시킴으로써 아버지와의 수직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무의식적 사고행위이다. 그런 ‘블라디미르’와 ‘성환’의 동일시에 대한 암시는 아버지를 향한 복합층위의 감정을 억누르며 아버지와 결합된 가족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표면적으로 ‘성환’이 ‘신효’의 소설을 대신 쓰게 된 동기는, ‘신효’의 욕망에 대한 연민 때문인 것으로 비춰지지만, 그 행위는 ‘신효’라는 타자를 위한 순수한 연민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을 남기고 싶은 ‘성환’의 욕망으로 표현된다. ‘성환’의 그러한 글쓰기도 자기기만으로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성환’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버지는 가족 질서의 표상이자 권위이다. ‘성환’은 부계 권력이 장악하는 가족사회에서 수동적인 태도로 살아온 인물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 ‘성환’의 의식이 그의 내레이션을 통해 소환되는데, 자신에게는 ‘신효’가 갖고 있는 구체적인 욕망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욕망이 결렬되거나 소진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무화된 상태로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효’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신효’의 소설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데 무려 십 년이란 시간을 할애한 ‘성환’은 ‘신효’의 욕망을 경험하고 자기화하고, 완성하기에 이른다. ‘성환’은 자기자신의 이름을 내걸지 않음으로써 아버지와 철저하게 단절된다. 아버지와 단절됨으로써 ‘성환’은 제도 바깥으로 밀려난 이후 그 경계 너머에서 ‘성환’은 어떤 꿈을 꿀 것인가.

 

경계 이후, 말해지는 것들

 

  [조류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확신한 주체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은, ‘한비’가 남긴 메모(나 자신에 대한 확신은 있어요.)를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이 속한 사회 바깥에 귀속된다는 것에 대해 결정적 증언을 할 수 있는 인간에게 사회(가정, 국가, 제도 등)만큼 불분명한 것은 없다. ‘한비’의 운명 앞에 놓인 사회는 ‘한비’에게 별다른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한비’가 자신이 조류로 환태해야 하는 것을 운명으로 인식하고, 그에 따른 고통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의 과거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그때 그 순간, 우리가 아니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보고, 느끼고, 주고받을 수 없었던 것들이니까.

 

  역시 ‘정석’에게 ‘한비’가 남긴 메모인데, ‘한비’의 운명론적 사고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한비’가 비록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 ‘정석’과 공유한 바는 없지만, ‘한비’는 ‘정석’과의 시간을 행복했던 것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조류가 된 이후(조류를 꿈꾸는 시간 이후)’의 삶이 가치 있듯이 ‘아직 인간인 시간’ 또한 가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조류인간]은 의식적으로 운명 앞에 놓인 인물들의 표정과 삶의 양식을 응시한다. ‘정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사실은 자기자신의 운명을 위해) ‘정석’ 앞에 나타난 ‘소연’의 말(찾으려고 찾은 게 아니에요. 만나게 돼서 만난 거예요.)도 같은 차원의 것이다.

  [조류인간]에서는 어떤 의지보다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양태가 강하게 드러난다. 아내가 택한 운명을 확인하기 위해 떠난 ‘정석’의 도정 또한 ‘한비’가 수용했던 자신의 운명만큼이나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동력을 얻은 것이다. ‘정석’이 신발끈을 묶고 있는 모습이 [조류인간]과 [러시안 소설]에서 각각 한 번씩 노출되는데, 그 장면이 바로 ‘정석’ 또한 어떤 경계를 향해 자신의 몸을 끝없이 추동시키는 ‘정석’의 삶과 운명에 관한 미장센이다.

  [프랑스 영화처럼]의 표제작 <프랑스 영화처럼>이 신연식의 전작들을 겨냥해 어떤 메시지를 함의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 영화처럼 살든지, 이태리 연극처럼 살든지 러시안 소설처럼 살든지 그러한 선택의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수민’의 내레이션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기홍’이 있으니 자신은 ‘기홍’에게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운명이라는 것은 시간차를 달리해서 어딘가에서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 인간이 어떤 몸으로 어떤 경계에 서 있든 자신을 이끄는 운명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연식이 말해온 것, 그리고 계속 그로 인해 말해질 것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