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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에서 프레임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캐릭터를 ‘박 처장(김윤석)’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1987]은 그의 시점에 매몰돼 있는 영화가 아니다. [1987]의 풍광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이 그랬듯 그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견딘 다양한 군상들의 시점에 의해 재현된다. 대개의 영화에서 감독들이 특정 캐릭터에 자신의 시선이나 가치를 고스란히 투영시키는 것은 영화의 보편적인 문법이다. 그러나 장준환 감독은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시대의 욕망을 택했다. 그 욕망을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장치가 바로 다양한 시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가라는 신념을 받들던 ‘조 반장(박희순)’이 자신에게 국가나 다름없던 ‘박 처장’의 진짜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두려움 가득한 눈빛은 실제로 그런 순간을 경험한 자의 동체를 이식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 만큼 처참했다.

 

  프레임에서 최소화되거나 은폐되었던 ‘안 계장(최광일)’의 시선은 어두운 밀실에서 이부영(김의성)에게 접견 기록을 건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데, 그 시선은 다른 캐릭터들이 지닌 그것의 무게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조카의 부검 장면을 내려다보는 삼촌(조우진)의 시선이나 박종철 열사(여진구)와 함께 내러티브의 수미에서 협응을 이루고 있는 이한열 열사(강동원)가 혼돈의 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마 마주볼 수가 없었다.

  장준환 감독이 여러 군상들의 시선을 프레임 안으로 끌고 들어온 것은 그 시대에 대한 최대한의 객관적 상(狀)을 제시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프닝시퀀스, 남영동 대공분실 탁자에 놓여 있는 안경에 비치는 상이라든가(그 때의 안경은 처참한 고문 현장을 어떤 누락과 은폐도 없이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렌즈가 될 것이다.), ‘공안부장(하정우)’의 차내 룸미러에 비친 상(윤상삼 기자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 기록이 담긴 박스가 비쳤던 것 같다.), 또는 ‘연희(김태리)’와 이한열 열사를 동시에 비춘, 신발가게의 거울도 기억에 남는다. 전투경찰의 군홧발과 몽둥이, 그리고 눈을 뜰 수조차 없는 최루 가스를 피해 들어선 신발가게의 거울에, 너무나 순수해서 어떻게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아름다움이 그 아름다움 그대로 거울에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안경이나 거울 등은 감독이 작심하고 거둬들인 카메라를 대신하여 영화 속의 또다른 렌즈로 작동한다.

  인간의 어떤 몸짓이나 인간과 관계된 어떤 현상이 객관적으로 떠오르기 위해선 그것이 맺히는 렌즈(거울이나 유리)가 투명한 것이거나, 적어도 그 렌즈 앞에 선 것을 바로 비출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박 처장’은 ‘조 반장’에게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자신 또한 공작의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때 ‘박 처장’은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본다. 그 액자는 투명한 것이 아니다. 액자 안에 들어있는 얼굴 때문이다. 카메라가 패닝되면서 ‘박 처장’의 얼굴이 마치 유리면을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상은 그래서 시대에 투지했던 ‘박 처장’의 순수하거나 객관적인 상이 될 수 없다. 유리면에는 몰락의 순간에도 자신의 모습과 행위들을 왜곡시켜야 겨우 직립할 수 있는(인간 흉내를 낼 수 있는) 추악한 몸체만 있을 뿐이다.

 

* 영화에서는 빈번하게 등장하지 않지만, ‘김정남(설경구)’은 그가 노출되지 않는 프레임 바깥에서 내러티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 자체로 거대한 미장센이 되는 인물인 것 같다.

 

* 그가 교회 외벽에 매달려 있다가 미끄러져 전선을 겨우 붙잡고 있는 씬이 있다. 그 때 교회 안에 있던 ‘박 처장’이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그의 그림자를 본다. 그의 실루엣이 유리창의 덧씌워진 예수의 형상과 겹쳐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뭔가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 씬 하나로 장준환 감독의 모든 영화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영화를 다시 한번 더 보고 [1987]에 대한 더 정교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