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변산]은 문학적이다. 초창기의 영화가 문학작품에 그 서사를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많은 문학작품이 영화화되었다. 그 중 이범선의 <오발탄>을 원작으로 한 [오발탄](유현목, 1961)은 아직까지도 손꼽히는 명작이다. 문학적인 영화에 대한 인상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문학적인 영화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문학적인 영화라면 뭔가 지루하고 정적이며 교시적일 거라는 게 일반 대중들의 생각이다.

 

 이창동 감독의 [시](2010)에서 한 소녀의 죽음으로부터 발생된 자신의 죄악을 온몸을 내던져 씻어내고자 했던 ‘미자’의 사투는 역동적이지 않다. 움직임은 느슨하고 동선 역시 제한적이다. 그러나 손자가 성폭행사건에 가담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녀가 보아온 시의 풍경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동일한 템포로 서사는 흘러가지만 ‘미자’의 내면은 빠른 속도로 무너진다. 그런 ‘미자’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 [시]의 주제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바, 그에 맞는 속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미자’가 보아온 자연 그대로의 풍광들이 카메라에 담길 때 속도는 왜곡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자’가 ‘희진’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속도는 생사를 앞질러갈 만한 속도이다. 문학적인 영화 [시]는 그래서 결코 지루하거나 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위태로운 인물의 내면을 아슬하게 비춰주면서 특유의 긴장감을 유발하고, 물리적인 속도를 뛰어넘는 역동성이 영화의 엔딩을 장식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변산]은 문학적인 영화다. 아름다운 서정이 있고 정제된 의미가 있다. 미장센은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학수’가 귀향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변산]의 서사는 ‘학수’의 탈향에 대한 욕망으로 추동된다.

 

 ‘학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랩을 할 때 사투리를 쓴다는 지적에 자신의 고향은 서울이라면서 변산을 부정한다. 에드워드 렐프에 의하면 ‘장소’는 인간에게 공동체적 공간을 부여하고 세계와의 관계 결속을 통해 그 실존의 근원을 깨닫게 한다. 특히 렐프에게 ‘집’과 ‘고향’은 인간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은 구성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연대와 내밀한 관계성을 갖게 되는 보편적 장소이다. 학수가 고향 변산의 장소성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근원지에 대한 부정이고 이는 곧 자기부정으로 이어진다. 자기부정은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린다. ‘학수’는 여섯 번째 참가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어머니’를 주제로 한 미션을 뛰어넘지 못한다.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고향 변산을 떠올리게 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까지 소환시키기 때문이다. ‘학수’의 아버지는 바로 아내의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학수’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긴 인물이다.

 

 ‘학수’는 동창 ‘선미’의 계략(?)으로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오게 된다. 고향에 내려오긴 했지만 아버지에겐 냉담하고 포악하기까지 하다. ‘학수’라는 인물이 눈에 띄게 유아적 성향인 건 아쉬운 대목이다. 이준익 감독은 작심하고 ‘학수’를 찌질한 캐릭터로 만들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좋은 일은 생기지 않는다. ‘학수’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몰리기도 하고, 자신의 시를 훔쳐 신춘문예에 당선된 선배를 만나기도 한다. 어렸을 때 ‘꼬붕’이었던 동창생이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학수’를 옥죄어 오고, 실패한 첫사랑을 다시 만나지만 ‘용대’에 의해 여의치 않게 된다.

 

 ‘학수’의 기억에 의존한 플래시백은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트라우마를 갖게 된 ‘학수’가 아버지와 화해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전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산]이 의미가 있는 것은 힙합이라는 장르를 충분히 살린 음악영화이고, 그 노랫말이 서사의 결을 성실히 따라가고 있다는 데 있다. ‘학수’가 직접 짓고 부르는 노랫말은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이다. ‘용대’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사실 ‘학수’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관객을 설득시키지는 못한다. 흘러나오는 학수의 랩은, ‘자신의 상황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선미의 대사)’ 학수 자신에 대한 질책이다. 성공하지 못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왔고, 애증의 아버지와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고, 자신의 첫사랑은 자신의 ‘꼬붕’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동창 ‘용대’에게 빼앗겨버렸고, 자신을 좋아했던 여자 동창생 ‘선미’는 어느새 작가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학수’는 자신을, 자신의 상황을 더욱 부정하게 된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수 있는 건 노을뿐이다.

 

  이 시는 ‘학수’가 고등학교 때 썼던 시의 도입부이다. ‘학수’는 잊고 있었지만 그 기억은 ‘선미’에 의해 온전히 복원된다. ‘선미’에게 ‘학수’는 단순한 첫사랑이 아니라, 시에 눈을 뜨게 해준 스승과도 같다. ‘학수’는 ‘선미’마저도 부정하기 급급하지만 ‘선미’가 보여주는 진심과 시에 대한 진지한 태도 덕분에 조금씩 ‘앞’을 보게 된다. 아버지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던 ‘학수’는 아버지를 정면으로 보게 되고, 벼르고 별렀던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아버지를 살해하는 영화도 있긴 하지만 장르의 특성상 학수가 아버지에게 펀치를 날리는 장면은 과한 듯하다. 아버지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아버지에 대한 증오나 복수심을 뛰어넘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학수’는 자신의 또다른 트라우마가 돼버린 ‘용대’에게 맞서기로 한다.

 

  ‘학수’와 ‘용대’가 갯벌에서 격투를 벌이는 동안 변산초등학교 동창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학수’와 ‘용대’의 일전은 시작부터 김이 빠진다. [영화는 영화다]의 엔딩씬을 비장하게 오마주한 시퀀스는 ‘선미’가 개입한 순간부터 코믹하거나 싱거운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고 짐작이 되었다.

 

 ‘학수’는 ‘용대’와 일전을 치른 뒤 ‘용대’를 ‘파리○’이라고 비아냥거린다. ‘학수’는 어린 시절 ‘용대’를 그렇게 취급했었다. 동창생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유년의 기억을 복원한다는 것은 자신의 근원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용대’가 등장하면서 촉발되었던 긴장감은 맥거핀으로 소모되지만, ‘용대’ 또한 [변산]에서 ‘학수’에게 큰 동기 부여를 하는 인물이다.

 

  ‘변산’은 낙후된 시골공간이다. 인물들의 사투리는 촌스럽고 의식도 그렇다. 적어도 ‘학수’에게는 그런 이미지이고 사실 객관적인 이미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촌스러움, ‘학수’가 벗어던지고 싶은 누추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변산’이 촌에 위치해 있으니 그곳의 인물과 정서가 '시골스러울' 수밖에 없다. 촌스럽다는 말의 부정적인 의미를 걷어내면 정답고 따뜻한 것들이 있다. ‘선미’가 지켜온 노을이 그렇고 그 노을이 번지는 ‘폐항’이 그렇다. 친구들이 10년 동안 지켜왔던 학수 모의 산소가 그렇고 ‘선미’를 비롯한 많은 변산 사람들이 구사하는 사투리가 또 그렇다. 폐항의 노을은 아무리 누추를 걸치고 고향에 돌아온 이가 있어도 그 자에게 ‘금의’를 입혀준다. 그것을 ‘학수’에게 일깨워준 사람은 다름아닌 ‘선미’이다. ‘선미’는 문학상을 받은 기념으로 이뤄진 인터뷰에서도 사투리 쓰기를 서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근원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근원지로부터 더 멀리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떠나는 행위는 ‘나’가 누구인지 명확한 인식 이후에 가능하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떠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떠난 것이 아니라 지워진 것이다. '학수'가 무시해왔던 고향 친구들이 '변산'의 장소성과 저마다의 근원을 지켜온 덕분에 '학수'는 다시 이들과 -에드워드 렐프가 말한- 내밀한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동질성과 자기근원, 장소성을 갖게 된다. '학수'가 새로운 것을 획득하는 게 아니라 원래 갖고 있던, 그러나 부정했던 것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변산]의 문학성을 말해야 한다. 변산은 바다와 뭍이 만나는 곳이다. 경계와 접점의 공간이다. 노을도 그렇지 않은가.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서 노을이 진다. ‘학수’가 변산에 내려온 이후 주로 있는 곳은 병원이다. 그 병원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다. ‘학수 부’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거류민처럼 떠도는 ‘학수’는 그렇게 경계를 떠돈다. 주변을 맴돌고 관계를 겉돈다. 경계에 서 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 경계 안쪽으로 들어오거나 아예 경계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학수’의 경우 경계 안쪽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것으로서 떠돎을 끝낸다. 그리고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경계를 지운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 사투리에 대한 경멸, 과거에 대한 부정, 경계가 지워짐으로 ‘학수’는 비로소 온전한 자신의 기억을 복원하게 된다. 그 기억은 엔딩씬에서 ‘학수’가 선보이는 랩에 축약돼 있다. [변산]의 힙합은 슬프다. ‘변산’과 같은 어정쩡한 공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과 같다. 하지만 포즈가 어설픈 것이다. 포즈가 어설프더라도 그들의 정서는 섬세하고 그들이 구사하는 사투리의 ‘딕션’은 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