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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사과]는 영화의 첫 시퀀스에 시위대와 진압대의 대치 장면을 담는다. 두 집단의 대치 장면은 영화에서 생략하고 있는 거대 서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시위대와 진압대는 직접적인 갈등을 빚어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시위는 (간호조무사로 일하다가)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주도한 것인데, 그들의 노동권을 박탈한 주체는 진압대가 아닌 것이다. 진압대는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적의는 오로지 진압대를 향하여 발산된다. 노동자들로 이뤄진 시위대가 진압대를 향해 겨누는 팔매질이 진압대원들을 가격한다 하더라도 그 충격파는 당대 정권에 전해지지 않는다. 정부는 진압대 뒤에 은닉한 채로 진압대를 조종한다. 모든 명령은 진압대에게 충실하게 전달되지만 진압대원들조차 명령의 발원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진압대원들에겐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누구의 명령인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다. 진압대원들은 전투경찰일 뿐이며, 전투경찰은 뒤에 은닉해서 자신들에게 ‘오더’를 내리는 거대한 실체보다, 눈앞에 실재해 있는,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실체를 훨씬 더 가깝게 인식한다.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며, 그 사명을 어기는 것은 국가에 복속된 자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므로 그들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적의 사과]의 메시지는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한 골목, 대열에서 이탈한 전투경찰과 진압대의 진압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고립된 노동자의 대치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왜곡돼 있는 적의 실체는 분명한 개인으로서 다시 한번 왜곡되고, 전투경찰(김민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구도는 한국사회가 내재하고 있는 권력의 모순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노동자는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경찰의 헬맷을 이용한다. 입대한 지 4개월밖에 안 된 전투경찰에게는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보호구를 되돌려 받기 위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는 시위대 전체와 전경대 전체의 대치에서 펼쳐진 긴장감이나 폭력성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치하는 와중에 노동자가 품고 있던 사과를 먹으려다가 그 사과를 떨어뜨리기도 하는 등 유머러스한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유머가 단순히 관객을 웃기기 위한 유머는 아니다. 유머를 통해 둘의 관계가 화해에 이르게 될 수도 있겠다고, 관객들은 짐작하지만, 그 유머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서로를 향한 조소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조소는 다시 공동체 단위의 대치 상황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갈등 상황을 야기한다. 전투경찰이 자신의 물과 노동자가 들고 있는 헬맷을 교환하자고 제안을 하고 노동자 또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노동자가 헬맷끈을 빙빙 돌리는 바람에 헬맷은 맨홀 아래로 빠지고 만다. 이때 이들의 갈등은 재점화되고 서로 몸싸움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는 한쪽 팔이 부러지고, 전투경찰은 왼쪽 허벅지에 상해를 입게 된다.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던 물물교환은 다시 심각한 격투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둘은 담벼락 앞에서 대치를 이어나간다. 그들 머리 위로는 담장과 허공을 가로지르는 전선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대치가 영원히 화해에 이를 수 없음을 암시하는 배치라 할 수 있다. 서로 불분명한 적과 싸우고 있으므로 그 싸움은 진정한 의미에서 종결을 맞이할 수 없다. 유머가 어떤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서로의 정체성을 포기한 상태에서의 가능성, 다시 말해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했을 때의 가능성이지, 정리해고된 노동자와 전투경찰로 맞서게 되는 상황에서는 그 가능성이 현현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지루한 대치를 계속하고 있는 공간에 ‘지랄탄’이 날아든다. 노동자는 그것을 보고 ‘지랄하고 있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신과 전투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조소임과 동시에, 두 사람이 자각하지 못한 모순적 현실을 향한 연출자의 목소리라고도 볼 수 있다. 나란히 누워서 허공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오줌을 갈기는 소년의 모습 또한 의미 없는 싸움을 향한 유머이다. 그러나 역시 [적의 사과]에서의 유머에는 맘놓고 웃을 수가 없다. 유머의 이면에는 이 사회의 불합리와 불평등, 모순과 부정의 단면들이 고스란히 적체돼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