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역설의 공간, 아수라에 보내는 조의

 

                                              - [아수라]의 인물론 : 한도경’을 중심으로.

 

 

  삶은 지옥이다.

 

 

  이것은 아주 평범한 수사이다. 이때의 지옥이란 처참한 삶의 현장에 대한 비유이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생동하는 감각을 얻고, 이성을 학습하고, 의지를 체득한다. 그러한 인간이 가닿고 싶은 끝은 삶으로서의 죽음이지, 지옥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삶은 자신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상관(홍반장)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의도치 않게 그를 죽이게 되고, 입막음이 될 줄 알았던 마약 중독자 작대기는 진술을 번복하고, 뜨거운 피를 나눈 형제라고 여겼던 후배 형사(문선모)는 자신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된다.

 

  한도경의 이야기다. 한도경이 박성배의 충직한 개가 된 것은 한도경의 아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내가 있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에서 한도경의 행동 양식은 확실하게 대별된다. 한도경이 아내와 함께 있는 병실 씬에서 한도경은 프레임상으로 아내의 몸 너머에 위치해 있다. 그 때 아내의 몸은 한도경을 인접한 아수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시킨다. 언제든 피를 묻힐 수 있는 한도경의 손은 아내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는 아내의 다리를 주무를 수 있는 착한 손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의 일이다.

 

  아내 때문에 박성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김차인에게 굴복했던 한도경은 을 욕망한다. 그것은 아내를 위한 욕망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욕망이다. ‘이기는 편이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한도경은 더 이상 어느 편에도 서고 싶지 않다. 박성배와 김차인의 사이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한도경은 스스로 끝없는 싸움의 끝을 보려고 한다. 이때 한도경이 호명하는 것은 비유로서의 끝이 아니다. 어떤 은유도 간섭할 수 없는 생지옥으로서의 끝이다. 내내 수동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하던 한도경은 그 때서야 비로소 주체의 몸을 얻는다. 병든 아내의 몸을 통해 환기시켰던 생의 감각이나 의지가 자신의 몸으로써 환원되는 순간이다. 견딜 수 없는 환멸과 모욕에도 자신의 역치의 값을 높여 견뎌온 한도경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고통과 억압을 본래 자신에게 주어진 역치로 수용한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엄격히 통제해 왔던 한도경은 그로써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 끝을 향해 달려가는 한도경의 복색은 남루하다. 그의 복색은 산 자들이 입는 수의에 가깝다.

 

 

  한편 한도경이 선택한 끝은 다른 인물들이 생각하는 은 일치하지 않는다. 엔딩 시퀀스 지점에서도 김차인과 박성배, 문선모까지 모두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정 가운데 있다가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을 만난 것뿐이다. 엔딩 시퀀스와 궤를 같이 하며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은 오직 한도경뿐이다.

 

  그 에 느와르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장렬한(미화된)’ 죽음은 없다. 아수라도는 죽음의 다양한 포즈를 허용하지 않는다. 장례식장이란 공간에서 서로를 죽이기 위한 광기가 충돌하면서 그 공간엔 역설적으로 활기가 유입된다. 그 활기는 시종일관 답답할 정도로 심리를 억누르던 시퀀스들에까지 자장을 미친다. 한도경은 엔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삶을 추동하는 에너지를 이식받는 것이다.

 

 

  문선모가 죽고, 김차인이 죽고, 박성배도 죽고, 한도경도 죽는다. 결국 아무도 남지 않는다. 누군가(은충호) 죽어서 장례식장에 모인 그들이지만, 그들 또한 죽은 자가 된다. 애초에 누구를 위해 그 장례식장에 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죽음을 응시하는 것은 카메라뿐이다. 카메라는 언제나 그랬듯 모든 장면을 응시한다. 그 응시에는 어떤 조의도 들어 있지 않다.

 

 

  죽어가는 한도경은 트랙아웃되는 카메라를 끝까지 바라본다. 그가 바라보는 카메라 너머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고 함께 살고 싶었던 세계가 있었다고 해도 한도경에게는 끝이 나야이를 수 있는 곳, 그러니까 이르자마자 끝나버리는 세계일 것이다. 그 불가능의 세계가 [아수라]의 프레임 바깥, 영화적 서사 너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아수라한복판에서 끊임없이 현실의 삶을 갈망하고 견뎠던 한도경에게만큼은 특별한 조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적의 사과]는 영화의 첫 시퀀스에 시위대와 진압대의 대치 장면을 담는다. 두 집단의 대치 장면은 영화에서 생략하고 있는 거대 서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시위대와 진압대는 직접적인 갈등을 빚어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시위는 (간호조무사로 일하다가)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주도한 것인데, 그들의 노동권을 박탈한 주체는 진압대가 아닌 것이다. 진압대는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적의는 오로지 진압대를 향하여 발산된다. 노동자들로 이뤄진 시위대가 진압대를 향해 겨누는 팔매질이 진압대원들을 가격한다 하더라도 그 충격파는 당대 정권에 전해지지 않는다. 정부는 진압대 뒤에 은닉한 채로 진압대를 조종한다. 모든 명령은 진압대에게 충실하게 전달되지만 진압대원들조차 명령의 발원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진압대원들에겐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누구의 명령인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다. 진압대원들은 전투경찰일 뿐이며, 전투경찰은 뒤에 은닉해서 자신들에게 ‘오더’를 내리는 거대한 실체보다, 눈앞에 실재해 있는,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실체를 훨씬 더 가깝게 인식한다.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며, 그 사명을 어기는 것은 국가에 복속된 자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므로 그들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적의 사과]의 메시지는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한 골목, 대열에서 이탈한 전투경찰과 진압대의 진압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고립된 노동자의 대치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왜곡돼 있는 적의 실체는 분명한 개인으로서 다시 한번 왜곡되고, 전투경찰(김민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구도는 한국사회가 내재하고 있는 권력의 모순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노동자는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경찰의 헬맷을 이용한다. 입대한 지 4개월밖에 안 된 전투경찰에게는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보호구를 되돌려 받기 위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는 시위대 전체와 전경대 전체의 대치에서 펼쳐진 긴장감이나 폭력성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치하는 와중에 노동자가 품고 있던 사과를 먹으려다가 그 사과를 떨어뜨리기도 하는 등 유머러스한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유머가 단순히 관객을 웃기기 위한 유머는 아니다. 유머를 통해 둘의 관계가 화해에 이르게 될 수도 있겠다고, 관객들은 짐작하지만, 그 유머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서로를 향한 조소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조소는 다시 공동체 단위의 대치 상황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갈등 상황을 야기한다. 전투경찰이 자신의 물과 노동자가 들고 있는 헬맷을 교환하자고 제안을 하고 노동자 또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노동자가 헬맷끈을 빙빙 돌리는 바람에 헬맷은 맨홀 아래로 빠지고 만다. 이때 이들의 갈등은 재점화되고 서로 몸싸움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는 한쪽 팔이 부러지고, 전투경찰은 왼쪽 허벅지에 상해를 입게 된다.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던 물물교환은 다시 심각한 격투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둘은 담벼락 앞에서 대치를 이어나간다. 그들 머리 위로는 담장과 허공을 가로지르는 전선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대치가 영원히 화해에 이를 수 없음을 암시하는 배치라 할 수 있다. 서로 불분명한 적과 싸우고 있으므로 그 싸움은 진정한 의미에서 종결을 맞이할 수 없다. 유머가 어떤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서로의 정체성을 포기한 상태에서의 가능성, 다시 말해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했을 때의 가능성이지, 정리해고된 노동자와 전투경찰로 맞서게 되는 상황에서는 그 가능성이 현현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지루한 대치를 계속하고 있는 공간에 ‘지랄탄’이 날아든다. 노동자는 그것을 보고 ‘지랄하고 있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신과 전투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조소임과 동시에, 두 사람이 자각하지 못한 모순적 현실을 향한 연출자의 목소리라고도 볼 수 있다. 나란히 누워서 허공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오줌을 갈기는 소년의 모습 또한 의미 없는 싸움을 향한 유머이다. 그러나 역시 [적의 사과]에서의 유머에는 맘놓고 웃을 수가 없다. 유머의 이면에는 이 사회의 불합리와 불평등, 모순과 부정의 단면들이 고스란히 적체돼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