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설원에서는 눈이 내리는 소리가 모든 언어를 잠식한다. 내리는 눈이 곧 언어다. 그래서 설원의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동안에는 되도록 말을 아낀다. 눈은 응결된 빛의 언어다. 눈이 녹지 않는 한 그 빛의 언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설원에서는 그 언어를 굳이 해독할 필요가 없었다. 설원의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것을 보는 것으로, 내리는 눈을 맞는 것으로, 눈밭을 걷는 것으로 그 언어를 이해했다.

 

  눈은 내렸다가 그치고, 언제 멎었는지도 모르게 다시 내리기를 반복한다. 이곳에서도 시간은 흐르지만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눈이 내리는 속도가 시간이 흐르는 속도다. 눈이 매서운 바람과 함께 퍼부어질 때는 시간의 유속을 가늠할 수가 없다. 눈이 바람 없이 잔잔하게 흩날릴 때는 시간의 흐름마저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설원에는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 있다. 그 나무를 구체적으로 이르는 이름은 없었다. 어떤 이는 그 나무를 얼어붙은 자의 뒷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이는 새로운 생명의 그늘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이는 푸른 피의 정령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설원의 나무를 사람이나 생명과 관련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나무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나무에서 눈의 결정들이 열린다고 믿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눈이 눈밭에 섞이도록 종종 나뭇가지를 건드리곤 했다. 눈밭의 결정들이 다시 떠올라 허공에서 무수한 눈발로 열린 뒤에 다시 지상으로 쏟아져 내린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나무를 베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조차 쉽게 꺾지 않았다.

 

 

- 『겨울 속으로』(마카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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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한 극장에서(광주극장이라고 해도 되겠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보았다. 통로를 사이에 둔 옆자리에는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계셨다. (할아버지가 아니면 어떡하지?) 그 할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가끔 어둠 속에서 눈빛을 빛내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이 어둠 속에 우리는 함께 앉아 있어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고양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어둠이다. 내 기억 속에 고양이는 늘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가끔 어둠인 채로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둠 속으로 지워지기도 했다.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고샅길에서 자주 발을 헛디뎠고 균형을 잃었다. 담장 위에 앉아있는 고양이의 실루엣이라도 보일라치면 놀라서 더 크게 휘청거렸다. 그런데 한 번도 넘어진 적은 없었다.(그랬던 것 같다고 믿는다.)

 

  사실 난 고양이라는 존재와 친밀하지 않다. 내가 자란 시골마을에서 고양이란, 악몽이나 추문의 가장자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마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고양이를 영물로 인식하는 태도가 고양이에 대한 금기를 만들어냈고, 그래서인지 우리 마을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집은 없었다.

 

  그래도!!

  고양이들은 있었다. 우리는 그 고양이들을 ‘도둑고양이’라고 불렀다. 도둑고양이를 둘러싼 괴소문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주술처럼 퍼져나갔다. 어두운 밤이 되면 고양이는 섬뜩한 이야기의 결말처럼 늘 내 뒤꽁무니를 따라왔다.

 

  고양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어른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지붕을 달릴 때면 우리집에서 항상 옆집 지붕으로 먼저 건너갔다가 그 다음 집으로 이동했다. 나도 모르게 생긴 습관이었다. 옆집으로 갔다가 다시 앞집으로 건너가는 식이었다. 한번은 그 규칙을 거슬러 뒷집을 먼저 밟아보았다. 뒷집은 평면형 지붕이었다. 빈민촌의 고양이들이 죄다 모여드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그것들은 서로를 부르고 뒹굴고 뒤엉켰다. 그것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빈민촌의 골목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어둠에 휘갈겨둔 낙서처럼 부유하다가 어느 집 담장에 스며들곤 했다. 고양이들이 뱉어놓은 울음이 뒤꿈치에서 바스락거렸다.

 

(내가 썼지만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소설 「달리-」에서도 고양이들이 등장하는데, 내가 어린 시절 느낀 고양이들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우리나라의 길고양이들과 달리, 일본과 대만의 길고양이들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나, 미짱, 루이, 쵸웨이……. 우리나라에서 길고양이는 그냥 고양이다. 종종 ‘고양이새끼’가 되고, ‘재수 없는 동물’이 되는 일도 다반사다.

 

어째서 우리는 항상 숨고 도망쳐야만 할까요.

 

 '1인칭 냐옹이 시점'의 내레이션 중 일부이다.

 

  일본에서 고양이는 건강과 행운을 상징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반대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칠 액운의 암시라도 되는 것처럼 고양이를 보면 놀라 진저리를 치고, 돌을 집어던지고,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 고양이들도 그걸 알기 때문에 항상 숨어 있거나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도쿄는 물론이고 니시나리와 같은 노숙자 마을에서도 고양이는 인간에게 쫓기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보호를 받으며 인간과 공존한다. 대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고양이를 향한 인간의 냉대와 저주 속에서 고양이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사진작가 김하연 씨는 10년 넘게 길고양이들을 보살펴왔다. 그가 사진을 찍는 이유가 가슴을 울린다. 인간과 고양이가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는.

  고양이보호협회의 분투도 눈물겹다. 콘크리트 더미에 갇힌 고양이를 구해달라는 구조 요청을 받고도, 바로 구조를 하지 못해 잠 한숨 못 잤다는 박선미 씨. 누가 그녀에게 그런 사명을 준 것인지, 내가 전혀 모르는 사실들을 견뎌온 자의 기도는 그래서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어느 상가 골목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고양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고양이를 발견하고 데려가는 사람이 약을 먹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고양이들을 그 일대에서 멸족시키기 위한 극약 같은 게 아니었을까.

 

  길에서 처음 만나 마음을 주고, 그 고양이(쵸웨이)가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죽을 때까지 그 고양이를 보살펴준 사람이 있다는 걸, 우리나라의 사람들은 몇이나 믿을까.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하고 떠나는 자의 마음은 고양이가 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

 

  그 때 어둠 속에서 휘청거릴 때 내게 손을 내민 자가 고양이였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이 어둠 속에 우리는 함께 있으니까, 라고 말하면서.

  나도 고양이가 되어보기로 한다.

  내가 그 골목에 앉아 울 때도 네가 지켜봐줬잖아. 기억나. 내가 다 울지 못하고 쓰러져 잠든 동안, 내가 다 울지 못한 울음을 네가 마저 울어줬잖아. 날이 밝으면 사라졌다가, 다시 어둠이 되면 이렇게 돌아오곤 했잖아.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중에서.

아이의 노래

생활2017. 6. 8. 02:15

  아이는 노래를 자주 부른다. 거실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부르기도 하고, 잠자리에 누워서 한 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다가 잠들기도 한다. 차를 타고 나들이 가는 동안 노래를 부르고, 집에 돌아오면서 또 노래를 부른다.

 

  아빠가 알려준 노래도 부른다. 아빠가 알려준 노래는 '귀여워', '아빠와 크레파스', '카드캡터 체리' 등이다. 사실 아빠가 몇 번 불러주기도 했지만, 아이의 사진들을 모아 노래를 깔고 이미지 영상을 만든 걸 수시로 보고 배운 노래들이다.

 

  뽀로로와 친구들이 알려준 노래 중에선 '고래의 노래'를 즐겨부른다. 유튜브 채널에서 독학으로 배운 노래도 있다.

  '핑거송'과 '상어가족'이다. 핑거송은 돌 때부터 영상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종종 본다. 한참 그 영상을 볼 땐 엄마, 아빠의 손가락에 무엇이든 끼우려고 했다. 그게 장난감 반지일 때도 있었지만 다 먹은 요구르트병을 끼워놓기도 하고, 아이클레이 덩어리를 붙여놓기도 했다. 그러곤 엄마, 아빠의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마미핑거마미핑거웨어아유, 히얼아이엠 히얼아이엠, 하우두유두.

 

  좀더 컸다고 느껴졌을 때가 '상어가족'을 부르며 율동까지 했을 때다. 율동을 잘 모르던 아빠는 아이가 그냥 손장난을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아이는 아가상어, 엄마상어, 아빠상어, 할머니, 할아버지 상어에  맞게 손동작을 하고 율동을 따라했던 것이다.

 

  어린이집에서 '올챙이'을 배워왔는지 그 노래를 흥얼거린 적도 있다. 아니, 아이는 흥얼거린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을 뿐. 엄마와 아빠가 있었고 이모가 있었다. 우리 셋은 아이가 부르는 노래가 무엇일지 골똘히 생각했다. 엄마와 이모는 금세 포기했지만 아빠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 아빠가 생각한 정답은 '올챙이송'. 아이는 올챙이송을 부르고 있었다. 부정확한 발음과 이상한 음정이었지만 그 노래는 올챙이송이었다. 아이가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알아맞힌 아빠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빠를 보면 나도 몰래 달려가

 안기고 싶어.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으음, 사랑이죠.

 

   요즘에 아이가 자주 부르는 노래이다.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다.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묻는다.

   아빠를 보면 나도 몰래 달려가 안기고 싶어, 왜 그럴까?

   아이가 노랫말을 풀어서 자신의 질문인 것처럼 물어보는 것이다. 

 

   희담이를 보면 나도 몰래 달려가 안아주고 싶어. 그 마음과 똑같은 이유일 거야.

 

   아빠는 설명했지만, 아이는 ????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아빠를 쳐다보다가 노래를 이어 부른다. (진짜로 물어본 게 아니라는 듯이)

 

   으음, 사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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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줄게

생활2017. 6. 3. 13:04

1.

 

 엄마와 나들이를 나가는 차 안, 엄마를 물끄러미 보던 아이가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너무 예뻐!!

 

 엄마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다.

 

 어머, 희담아, 그런 말은 언제 배운 거야.

 

 엄마는 하루종일 설렌다.

 혼자서만 좋아하던 친구에게 마침내 고백을 받은 소녀처럼.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해주고,

 엄마의 엄마에게도 말해준다. 자랑처럼.

 

 엄마, 희담이가 나 예쁘대.

 

 언니에게도 말하고, 조카들에게도 말해준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서도 호들갑이다.

 

 

 아이의 예상치 못한 한마디가 엄마의 하루를 들뜨게 한다.

 

 

2.

 

 아이의 신발을 신기고 엄마는 오늘은 뭘 신지? 고민한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해줄게, 하며

 아이가 제 엄마에게 신발을 신겨준다.

 어제 신었던 그 신발은 안 신으려고 했던 엄마지만,

 아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아이가 신겨주는 신발은 세상에서 딱 한 켤레밖에 없는 신발이다.

 꼬물거리는 손가락이 뒤꿈치에 닿을 때마다 엄마는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웃고 만다.

 

 엄마가 웃자 저도 따라 웃는다.

 엄마가 울면 아이도 따라 운다.

 엄마의 얼굴은 자신의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다.

 

 아이가 손을 뻗어 엄마의 얼굴을 만진다.

 더 환하게 웃어보라고 거울을 닦는 중이다.

 

 

3.

 

  내가 안아줄게, 하며 안아준 일도 있다.

 

 

  언젠가 아이에게,

 

  언제나 엄마, 안아주고 지켜줘야 해.

 

  아빠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아빠는 뭉클하고,

  엄마는 심쿵,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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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돌아오는 시간

 

 

  둥지를 떠난 새들은 둥지를 어떤 곳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새에게는 기억이란 게 없다. 만약 새들에게 기억이란 게 있었다면 새들은 자유롭게 허공을 날지 못했을 것이다. 새들에게 기억 대신 남겨진 것이 있다면 그건 어미가 틀었던 깃의 체온일 것이다. 그 따뜻한 감각이, 새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기억이라면 기억일 것이다.

 

 

  새 새끼들은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먹고 자란다. 둥지 안에서 아직 눈도 못 뜬 새끼들이 먹이를 물고 돌아온 어미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미의 발끝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 때문이다. 그 때 어미가 발끝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은 둥지에 얽혀있는 잔가지들이 아니라 허공의 끝자락 어디쯤이 아닐까. 자신이 더 이상 날아가도 되지 않는 허공. 그대로 나는 법을 잊고 추락해버려도 상관없는 절벽에서 어미는 다시 또 자신이 날갯짓을 해야만 하는 숙명을 깨닫는 것이다.

 

 

  ‘향숙’은 병원에서 가족들을 기다리면서 막내 ‘혜연’이 사다준 간식을 먹으며 (그것도 먹어선 안 되는 호빵) 행복해 한다. 하지만 당뇨 때문에 발목 절단 수술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어미새로 치자면 위태로운 허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입을 쩍쩍 벌리며 먹이를 기다리던 자식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다는 것.

 

 

  둘째 ‘금옥’이 들려주는 남편 이야기에 모두들 즐거워하지만 첫째 ‘혜영’만큼은 웃지 않는다. 이혼 후 금옥의 집에서 얹혀살고 있는 ‘혜영’은 아이들에게도 관심이 없고 허구한 날 술만 마시는 제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혜영이 금옥에게 날을 세우는 진짜 이유는, 자신의 결혼 실패로 인한 상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첫째와 둘째가 티격태격하면서 분위기는 어색해지고, 막내와 셋째에게까지 불똥이 튄다. ‘향숙’은 오랜만에 만난 딸들이 다투는 게 맘에 들지 않지만 그녀에게 낯선 풍경은 아닌 듯하다. 서로를 물고 뜯던 실랑이 소리가 잦아들고 병실 안은 침묵이 감돈다. 그리고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풍경과 섞이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철택’이다. 철택은 한평생 자신의 아내 ‘향숙’을 핍박해온,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장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셋째 ‘금희’의 아침을 차려주고, 그리고 딸을 위해 생선 고깃살을 발라주는 살뜰한 모습도 있다. 아내의 병문안에 가기 전 짧아서 빗을 필요가 없는 머리를 손질하기도 하고 (다시 손으로 헝클어버리긴 하지만) 병실에 와서 아내가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는, 이른바 ‘츤데레’다. 딸들의 대화에 끼어들진 않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은근히 웃기도 하고, 딸들과 손주들이 아무렇게나 벗어둔 점퍼를 개키기도 한다.

 

  철택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향숙도 그랬을까?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당신 때문에라도 더 견디고 싶어져요.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가 있어서 다행인 적이 있었을까.

 

 

  딸들이 비를 핑계로 가봐야겠다고 하자 ‘향숙’은 아쉬워한다. 가장 늦게 병실을 나온 사람은 ‘철택’이다. 철택이 아내에게 무엇인가를 건네는데, 검은 비닐봉투에 담겨 있어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아내가 먹고 싶어하는 고추장과 김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내를 위한 마음이 담겨 있으리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혜영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금옥이 돈봉투를 건네지만 철택은 한사코 받지 않는다. 철택이 풍족해서 딸이 준 용돈을 받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아직은 더 주고 싶은 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미새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동안, 그리고 새 새끼들이 어미새를 기다리는 동안, 밤낮으로 둥지를 지켜온 건 아비새니까. 새 새끼들이 기억하는 것은 어미새의 체온이지만, 그들은 분명 아비새의 그늘 아래에서 자랐으니까.

 

 

  혜영도, 금옥도, 그리고 금희와 혜연도 각자 견디고 사는 무게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갖고 있다. 새의 기억이 어미의 체온이 전부라면, 인간의 기억은 그 체온이 시작점이다. 그 체온으로부터 많은 기억들이 소환되고 재생된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 절벽 끝까지 내몰려 어둠과 추위와 두려움에 떨게 될 때, 자신의 기억의 근원, 그 따뜻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마이쮸를 찾아줘!!

생활2017. 5. 30. 11:28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엉엉 울기 시작한다.

 

  책방에서 쓰러져 잠들었던 나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깼다. 울음소리는 크다. (알람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로 만들어진 것도 있던가? 있다면 아주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일어나기 직전에 꾸었던 꿈에서 아이는 마이쮸를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그걸 먹으려고 했겠지? 꼬물꼬물 은박을 벗겨내고 분홍빛 캬라멜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이었겠지. 그런데 그걸 땅바닥에 흘렸을까.

 

  눈을 떠보니 마이쮸가 온데간데없는 것이다. 침대 여기저기를 찾아보았겠지. 엄마 치맛자락도 들춰보고 홑이불도 걷어보았겠지. 아무리 찾아도 마이쮸가 보이지 않아서 아이는 슬펐던 것읻.

 

  이상한 일이잖아.

 

  분명 손에 쥐고 있었는데,

 

  어디 간 거야, 내 마이쮸!!!

 

  마이쮸, 를 외치며 아이가 운다.

 

  아직은 자신이 꾸었던 꿈과 꿈에서 깨어난 직후의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다.

 

  엉엉 우는 아이를 안고

  거실로 나온다.

 

  거실에는 책들이 늘어서 있다.

  아이는 자신이 읽은 책들을 일렬로 늘어놓는 걸 좋아한다. 그것도 열을 정확히 맞춰서.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에게,

  아빠가 묻는다.

 

  이거 (쭉 늘어서 있는 책들) 누가 한 거지?

 

  아이는 울음을 그칠 듯 말 듯하다가

  책들을 본다.

 

  그러곤 그 중에 책 하나를 집는다.

 

  아이가 요즘에 좋아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책이다. 그 책을 품에 안으면서 아이가 말한다.

 

  "희담이가 했지!!"

 

  어느새 아이의 울음은 멎었다.

 

  이 아침의 일이,

  꿈 속의 일인지

  아니면 현실 속의 일인지

 

  아빠는, 어젯밤 읽은 책을 다시 훑어보는(책장을 그냥 넘기는 수준) 아이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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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야구장 가서 야구를 관람하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일을 나가지 않는 일요일이 그나마 야구장 가기 적합한 날이지만(일, 월 이틀 쉬지만 슬프게도 월요일은 야구 경기가 없다.) 일요일에 홈경기가 아니고선 ‘직관’은 어렵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운 좋으면 네 번까지 홈경기가 잡혀 있다. 그런데 아내 눈치 보느라 야구장 간다고 말하는 것도 어렵다. 아내의 지론대로라면 일요일과 월요일은 내게 휴일이 아니라,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날이다. 네 살배기 아이를 함께 돌보는 것, 끼니를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것, 욕실을 청소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것 등등 내가 쉬는 날 할 일은 은근히 많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다 내팽개치고 나, 야구장 갔다 올게, 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른바 와이프 시프트다.

 

  야구장에 한번 가기 위해선 일단 미리서 모월 모일 야구장에 가겠노라고 선언해두어야 한다. 그것도 여러 번. 그런 건 아내가 잘 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구장에 가는 시점에 맞춰 아내 눈에 거슬리는 집안 풍경을 그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 욕실은 깨끗한 상태여야 하고, 주방은 나 없이도 아이와 함께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청결해야 하며, 분리수거함에 재활용 쓰레기들이 비워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의 ‘기분’이 좋아야 한다. 아내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집안이 반짝반짝 빛난다 하더라도 야구장 외출은 허락되지 않는다.

 

  허락,

  아내는 허락에 대한 표현은 분명히 한다. 응, 그렇게 해. 뭐 싸줄까?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굳이 가지 마, 라고 말하지 않는다. 전 날 선발로 나선 투수가 다음다음날 계투로 마운드에 오를 때의 그 번뇌 가득한 표정으로 알아서 해, 라고 말한다. 그래, 나는 알아서 가지 않는다. 야구장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아이랑 노는 것도 기뻐, 라는 표정을 기꺼이 지어 보이며 쉽게 포기한다.

 

  와이프의 시프트는 이처럼 단순하다. 말은 알아서 하라고 하지만 표정은 그게 아니다. 나는 그 단순한 시프트에 걸려들지 않는다. 말, 워딩보다는 표정에 주목한다. 수준급 포수는 투수와 주고받은 사인대로 오지 않는 공에 대해서도 예상하고 미트를 준비한다. 그래야 폭투가 나오지 않는다. 폭투라는 말은 던지는 자, 그러니까 투수가 범한 과오의 의미가 강하지만, 그걸 받지 못한 포수에게도 그만큼의 과실이 있다. 포수가 받아 공을 빠뜨리지 않으면 주자가 있더라도 진루나 득점을 허용하지 않으니까.

 

 

  와이프의 표정(sign)에는 기만의 의도가 없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폭투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순순하게 아내의 표정에 담긴 뜻을 잘 받아주면 된다. 아무에게도 과오가 생기지 않는다.

 

  다만, 직관을 위해선 2, 3주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되는 것뿐.

  한화이글스의 신성현 선수는 정든 팀을 떠나는 게 어려웠다. 동료들에게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고양원더스에서부터 자신을 지켜봐준 김성근 감독에게도 똑같은 말을 전했다. 한번도 타이거즈의 일원인 적이 없고 다만 상대팀 선수로만 봐왔던 선수지만, 그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안타까웠다.

 

  노수광 선수도 김기태 감독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울먹거렸다. 타이거즈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이 성장한 팀에 남아 자신의 이름을 팬들의 마음속에 더 강하게 각인시키고 싶은 꿈이 있었다.

  이홍구 선수는 트레이드된 이후, 어느 기자에게 기아는요? 라며 타이거즈 경기 결과를 묻기도 했다. 옷을 갈아입고도 아직 마음까지는 완전히 이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이 4:4 트레이드 이후, SK도 잘 나가고 기아도 잘 나간다는 것이다. 이홍구 선수는 팀의 연승 과정에서 결승타를 때려내기도 하고 홈런 세 개를 몰아치면서 팀 승리에 기여하였다. 노수광 선수도 이적 이후 몇 경기에서 팀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잠깐의 부침을 겪고 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노수광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충격적인 이별이었을 테지만, 노수광 선수도 그렇고 이홍구 선수도 그렇고 팀에 잘 적응하고 있다. 신성현 선수도 그럴 것이다. 신성현은 어제 삼성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11회말 대타자로 타석에 들어섰다. 안타 하나면 경기를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타석에서 많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산베어스의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들어서는 타석에서 자신을 선택해준 팀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신성현이 받아친 공은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에 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김헌곤 선수가 빠르게 달려와 미끄러지며 그 공을 받아냈다. 아쉬운 플라이볼이 되었다. 신성현 선수의 허탈한 표정이 중계화면에 잡혔다.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신성현 선수의 모습을 카메라가 비추고 있었다.

 

  그래도 잘했어.

 

  동료들은 그렇게 위로해줬을 것이다. 이제 막 팀을 옮겨온 그의 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잘했어, 어깨를 토닥거리며 하는 말이, 잘 왔어, 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팀을 옮겨온 선수만 이별을 경험한 게 아니라, 그를 맞이하는 선수들도 그 날 이별을 경험한 당사자들이다. 그들은 떠나보낸 최재훈 선수를 생각하며 아쉬워하기보다는, 새롭게 만나게 된 신성현 선수를 반갑게 맞이하고 그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해주었을 것이다.

 

  마냥 슬퍼하고 안타까워만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어제도 롯데자이언츠와 KT위즈 간의 트레이드가 발표되었다. 오태곤 선수와 장시환 선수에게 초점이 맞춰진 트레이드였다. 오태곤 선수가 펑펑 울었다는 말을 듣고 또 가슴이 아파졌다.

 

  하지만 하룻동안 그는 평정을 되찾았을 것이다. 노수광이 그랬듯, 이홍구가 그랬듯, 김민식과 이명기가 그랬듯. 그리고 신성현 선수와 최재훈 선수가 그랬듯이.

 

  웃으면서 오늘의 경기를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타이거즈를 지켜줘!!

 

 

  전문가들은 기아타이거즈가 두산베어스의 독주를 막을 대항마라고 점찍었다. 팬들 역시 기대를 모았다. 최형우 선수가 영입되었고, 양현종, 나지완 선수가 잔류했다. 새로운 외인, 팻딘과 버나디나 선수에게 거는 기대도 컸다. 무엇보다 김선빈, 안치홍 선수가 군 제대 후 풀타임을 치르는 해였다.

  김주찬, 이범호, 서동욱, 김주형 선수에 노수광 선수까지, 2016년 좋은 기억을 준 선수들이 대기하는 타선을 보고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수없이 노출된 불안요소가 있었다. 기대대로 양현종, 헥터, 팻딘 선수까지 3선발은 문제가 없었으나, 4, 5선발과 불펜이 문제였다. 4, 5선발로 기대를 받았던 홍건희, 김윤동 선수는 4월 2일 삼성라이온스 전에서 무너졌다. (임기영이 4월 6일 SK와이번즈 전에서 호투를 펼친 건 다행이었으나 오늘 4월 12일 두산베어스 전에서 다시 한번 검증이 필요하다.)

 

  홍건희 선수는 4월 11일 두산베어스 전에서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팬들을 더 좌절시킨 건 선수의 부진보다 코칭스태프의 투수진 운용이었다.

  홍건희 선수가 3실점을 한 뒤 타선은 2득점을 올렸다. 이 날 경기를 잡기 위해선 김윤동 선수가 조기 투입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홍건희 선수는 3회에도 그대로 마운드에 올랐다. 결국 주자 2명을 남기고 교체되었다. (경기를 잡기 위해선) 교체 시점이 늦은 감이 있었지만 주자 2명을 막으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홍건희 선수를 대신하여 마운드에 오른 건 김윤동 선수가 아니라, 김광수 선수였다. 4월 2일 삼성라이온스 전부터 전혀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김광수 선수를, 중요한 순간에 투입한 것이다. 경기는 초반이었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순간이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는 것을. 이런 생각도 들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기를 만들어서 패전조와 백업요원들을 투입시키려는 건가. 이런 패턴으로 팬들을 허무하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4점을 더 내줬지만 곧바로 2점을 만회하였다. 4:7. 따라붙기 어려운 점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김광수 선수 다음에 올라온 선수는 박진태 선수였다. 박진태 선수는 타이거즈가 더 성장시켜야 할 선수지만, 이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많은 팬들이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인내를 이 순간 버렸다.

  이미 승부가 기울어진 상황이라면 당연히 이해한다. 하지만 4:7이었고, 아직 4회였다. 승패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승부의 흐름을 너무나 알기 쉽게 바꿔놓았다. 이를 악물고 쫓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박진태 선수 대신 김윤동 선수가 올라왔다 해도 어차피 1+1 전략으로 두산베어스 타선을 상대할 계획이었으면 적어도 8회까지는 비등하게 경기를 이끌면서 역전의 기회를 노렸어야 했다. 그러나 코칭스태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기태 감독의 생각인지, 이대진 코치의 생각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어제 경기 상황만 보면 기아타이거즈의 가장 큰 문제는 4, 5선발이나 불펜이 아닐지도 모른다.

 

  뒤늦게 나온 김윤동 선수와 박지훈 선수는 한 이닝씩을 맡았다. 허무한 소모였다. 어떤 의도로 등판시킨 건지 알 수 없었다. 선수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등판 시점과 상황이 두 선수에게 어떤 동기와 의미를 부여할는지 알 수 없다.

 

  노수광 선수가 타이거즈를 떠났고, 김민식 선수가 타이거즈로 왔다. 어제 경기에 선발로 나선 한승택 선수보다는 중량감과 안정감 면에서 돋보였다. 포수진도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김진우 선수가 2군 경기에 등판해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지만 4, 5선발이 확정되려면 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임기영 선수의 호투를 기대한다.) 불펜진도 재정비되어야 한다. 임창용 선수에게 당분간 클로저 역할을 맡기지 않을 것 같지만, 다른 복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문제들보다 어제와 같은 경기 운용이 더 큰 문제다. 기회가 필요한 선수에게는 기회가 주어져야겠지만, 준비된 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준비가 필요한 자들에게는 더 준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길.   

20170407 노수광

야구2017. 4. 7. 12:09

 

  ‘우리’ 노수광 선수가 떠났다. (야구가 뭐라고) 아침부터 슬퍼진다. 노수광 선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노수광 선수가 아니었다면 김민식 선수와 같은, 우리 팀에 필요한 선수를 얻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냉정하게,

 

  비정(非情)이란 말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로는 비정한 세계라고 하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하지만 이번 트레이드는 감탄구토나 토사구팽의 논리로 볼 수 없다. 오늘의 일이, 비정한 세계라고 비유되는 프로에서 종종 일어나는 ‘비정한 사건’은 아니다.

 

 

  포수는 우리 팀의 취약 포지션이었다. 성장 가능성을 보였던 백용환 선수와 이홍구 선수가 타격과 수비에서 고만고만한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두 사람을 대신하여 이용규 선수의 보상으로 건너온 한승택 선수에게 기대를 거는 팬들이 많아졌다. (부상으로 이탈 중이긴 하지만) 백용환 선수와 이홍구 선수는 올해 스프링캠프부터 좋은 모습을 보인 신범수 선수보다 기대치가 낮아진 상황이었다. 리빌딩 체제 하에서 유독 포수진만 그 속도가 더디었다.

  이번 트레이드는 포수진 리빌딩의 실패에 대한 방증이다. 결국 백용환, 이홍구 선수가 주전포수로 나서고 틈틈이 한승택 선수에게 기회를 부여해서 성장시키는 플랜은 실패한 것이다.

  코칭스태프에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백용환 선수가 부상에서 복귀한다 하더라도, 작년의 부진을 얼마나 상쇄시킬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지부진한 포수진의 안정화를 뒷짐지고 바라볼 수만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플랜B를 세웠을 것이다. 백용환 선수나 이홍구 선수에게 바랐던 역할을 해줄 선수를 물색하다가 SK와이번즈의 김민식 선수를 낙점하고 트레이드 카드를 조율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그리고 이미 오늘자로 배포된 기사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추론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노수광 선수를 트레이드 카드로 내민 것은 아닐 것이다. 여러 기사문들을 읽어봐도 기아타이거즈가 트레이드 카드를 여러 번 조율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항상 성실한 모습으로 연습에 매진하고, 또 연습의 결괏값을 만들어내는 노수광 선수는 코칭스태프로부터 확실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 미래의, (먼 미래도 아니다. 내년이 될 수도 있고) 외야진의 중심이 되어줄 선수였다. 그래서 노수광 선수가 트레이드 명부에 올랐다. 염경엽 단장이 노수광 선수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김민식 선수처럼 요긴한 자원을(포수여서 더더욱) 내준다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선수를 받아야 하므로 노수광 선수의 이름을 직접 거명한 것이고, 고민하던 코칭스태프(+구단)에서는 이에 응한 것으로 보인다. 노수광 선수가 귀중한 자원이 아니어서 트레이드 보낸 것이 아니라, 노수광 선수가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자원이기 때문에 트레이드가 성사된 것이다.

 

 

  김주찬 선수와 새롭게 영입한 최형우 선수와 버나디나 선수, 이 선수들만으로도 외야진은 꾸려진다. 백업이 필요하긴 하지만 안치홍 선수가 복귀하면서 자리가 애매해진 서동욱 선수도 외야로 갈 수 있고, 어쩌다 한 번씩 믿음직한(믿을 수 없는) 수비를 보여주는 나지완 선수도 외야로 갈 수도 있다. 이 외야진이 완성된 형태라고는 말할 수 없다. 김호령이나 오준혁 선수 등도 있지만 노수광 선수가 있으면 시즌을 치르면서 발생하는 변수에 효율적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노수광 선수가 백업 선수로만 있기에는 아까운 면도 있다. 타석에서 꾸준히 기회를 부여받았던 2016년 시즌, 손가락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얼마나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던가. 그런 면에서 이번 트레이드는 노수광 선수에게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와이번즈의 외야진을 감안하면 노수광 선수는 당장 오늘부터라도 선발 외야수로 경기에 나설 수 있으니까.

 

 

  냉정하게.

  냉정은 비정(非情)과 다르다. 냉정은 마음속의 어떤 열기를 지우고, 그래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 상태이다.

 

 

  나는 냉정하게 이런 결론을 얻었다.

 

  그래, 노수광 선수를 위해서도 잘 된 일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냉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게 참 어렵다. 특히나 이렇게 따뜻한 봄날에는.

 

  노수광 선수에게는 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노수광 선수를 다시 볼 수 없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노수광 선수의 이름을 마킹해서 유니폼을 구입하려고 했었다.

  노수광 선수가 처음 우리 팀에 온 날을 기억한다. 네 명의 선수가 찍힌 사진 프레임에서 노수광 선수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걸 느꼈다. 느낌일 뿐이지만, 이 선수는 정말 잘하겠다, 열심히 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기아타이거즈는 해태타이거즈 시절 보여주었던 패기가 사라진 팀이었다. 흔히 헝그리정신이라는 말로 포장되는 그 패기 말이다. 노수광 선수는 타이거즈가 잊고 있던 그 패기를 되살려준 선수라고 생각한다. 안타를 치고 질주하는 모습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눈물이 날 정도로. 노토바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그라운드를 질주하면 길고 길었던 타이거즈의 암흑기의 끝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야구가 뭐라고,

눈물이 날 것 같다.

 

냉정해지는 것은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성우 선수, 궂은 일 감당하며 견뎌줘서 고마워요.

  이홍구 선수도 더 발전할 거예요. 힘내요.

  윤정우 선수, 마음이 참 아프네요. 타이거즈에 다시 와서 빛을 보길 바랐는데, 더 많은 기회를 받으면서 더 좋은 선수가 되길 빌어요.

 

  사진 출처 : O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