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으로서 관객과 전문가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관계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되고, 삶을 도피하게 되는 인간의 형상을 우물에 빠진 돼지의 형상으로 드러낸다.  

 돼지라는 동물이 인간의 둔한 형상이나 우매한 정신의 소유자와 연결될 때가 있다. 인간에게, 이 돼지야, 돼지 같다,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폭언이다.

 그러한 폭언을 매일같이 듣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타이거즈의 나지완 선수이다. (이하 나지완)

 

 나지완은 2015 시즌 심각한 부진을 겪었다. 2014년 전반기까지 최고의 활약을 펼쳐 인천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까지 차출되었으나 대표팀에서의 부진과 부상이, 그의 군면제 혜택과 맞물리면서 여론이 악화되었고, 2015년 시즌 내내 부진을 면치 못하자 커뮤니티 사이트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거의 전부라고 해도 틀린 표현이 아닐 정도.) 사실 나지완의 부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나지완에 대한 팬들의 감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지완을 줄기차게 비난해온 일부 팬들도 있었지만, 어느 팀에든 팬들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고, 경기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선수는 있다.

 

 

  당시 대표팀을 맡았던 류중일 감독은 타이거즈 선수 중, 안치홍과 나지완을 놓고 어떤 선수를 차출할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안치홍은 나지완과는 달리, 실력과 인성 면에서 타이거즈 팬들의 큰 지지를 얻었던 선수였다. 실제로 많은 팬들이 안치홍의 대표팀 승선이 불발된 것을 많이 아쉬워했다. 나지완이 대표팀에서 잘해주었다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지완은 타석에 몇 번 서보지도 못하고, 우승의 감격과 혜택을 누렸다. 그의 인터뷰에서 부상을 숨기고 뛰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안치홍을 향해 있던 동정과 안타까운 시선이 나지완을 향한 분노와 증오로 급격히 확산되었다.

 

 

  2015년, 나지완은 상당한 중압감을 안고 시즌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야구는 잘 되지 않았다. 그가 어이없는 공에 배트를 휘두를 때마다, 팬들은 그를 더 비난했고, 그는 더 극심한 부진을 겪게 되었다. 안 되도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었다. 보다못한 김기태 감독은 나지완을 2군으로 내려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묘책은 아니었다. 그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뭔가 해줄 거라는 믿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디시인사이드 기아타이거즈 갤러리에 들어가본 것은 그 때쯤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곳인 줄은 몰랐다. 나지완은 그곳에서 린치를 당하고 있었다. 욕설과 인신공격은 기본이었고, 자살을 강요하거나, 죽여버리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공격적 성향의 글들이 많았다.

 

 

  나는 야구선수 나지완이 아닌 인간 나지완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그리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게시판을 도배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깊은 환멸을 느꼈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는 과격한 표현이 일상적으로 쓰이고, 특정인에 대한 폭언이 어느 정도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는 공간인 것 같았다. ‘팬이니까 욕할 수도 있지.’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소유한 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부진한 선수들을 향해 폭언을 퍼붓는 건 스트레스 해소를 넘어 하나의 유희처럼 보였다. 그게 정상적인 행위로 간주되는 그 공간의 윤리가 납득하기 어려웠다. 디시인사이드가 일베와는 다르다는 말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차이성은 있겠지만 비난과 욕설과 폭언이 공공연하게, 그리고 빈번하게 쓰인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같은 공간처럼 보인다.

 

 

  팬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에는 잘못된 시혜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선수들을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을 준 적이 없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소속 선수에게는 마땅히 비난을 가할 수도 있고, 폭언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팬이 없으면 팀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런 팬들은 팀에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의사 표현은 자유이지만, 그 자유가 어떤 표현도 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표현이 특정인의 인권과 권익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위법 행위이다. 팬 운운하기 전에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언행인 것이다.

 

 

  오늘(201647) LG전에서 나지완은 외야 수비 중 포구 실책을 범했다. 투구수가 많았지만(102구) 그 때까지 잘 버텨주던 지크는 그 이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오늘 경기의 패인이 나지완에게 있다고 해도 부정할 여지는 없다. 불펜 등판 이후에 선발 등판이 미뤄져 컨디션 조절이 어려웠음에도 지크는 꽤 잘 던져주었고(5회까지 무실점), 난공불락 소사를 상대한 타선도 공격의 응집력을 꾀하여 3점을 선취했다. 나지완의 실책이 오늘 경기를 갈랐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패인을 더 대자면 타자들이 있다. 타자들이 LG의 불펜을 공략하지 못했다. 소사가 내려가고 신승현부터 임정우까지 여러 명의 불펜투수가 마운드에 올랐지만 타이거즈의 타자들은 공격을 풀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패배의 책임이 나지완 개인을 향해 더 크게 전가되는 것은, 나지완이란 선수에게 찍혀 있는 낙인 때문이다.

 

 

  나지완의 실책이 팀 패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쳐도 나지완을 향해 인격모독성 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 상식에선 그렇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다 그 정도의 상식은 있을 것이다. 상식이란 말은 '쉽다'라는 의미보다 '기본'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몰상식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을 지키지 않는 사고나 특정 행위를 뜻한다. 돼지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돼지의 형상은 나지완의 것이 아니라, 그를 비난하는 극성스러운 팬들의 것이다.(팬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지만 다른 호칭이 없어서)

 

 

  2016 시즌이 시작되고 네 경기를 치른 현재, 나지완이 보여준 것은 아직 미미하다. 나지완은 안 좋은 기억을 빨리 털어내고 바로 다음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프로는 변명이 필요없다. 오직 실력과 결과로 말하면 그뿐이다. 스스로는 아직 우물 속에 빠져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많은 팬들의 눈에는 멀쩡한 모습으로 타석에 서 있다. 그러니 제발, 우물쭈물하지 마.

 

 

 

 

  이종범 선수는 자신의 은퇴 시기는 스스로 정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혀 왔지만 팬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2013년이 선수로서 그의 마지막 해였다는 것을. 그러나 선동렬 전 감독은 스스로 시기를 세우고 마지막 한해를 준비했던 그를 압박해서 그라운드 밖으로 내몰았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아닌, 자신을 오랫동안 지지해준 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프링캠프 시작 전부터 담배를 끊고 운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자신이 뜻한 바대로 되지 않았고 201341, 거짓말처럼 그는 은퇴를 했다. (공식적으로 보도가 된 건 3월 마지막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종범 선수만큼 팬들은 아쉬워했고 구단과 선동렬 감독을 비난했다. 적어도 타이거즈 팬들에게 이종범 선수는 타율, 타점, 도루, 득점 등등 어떤 수치로서 환산되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너무나 허무하게 팀을 떠났다. 다른 팀에서라도 뛰려고만 했다면 방법은 있었겠지만 그에겐 타이거즈가 아니라면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이종범은 그런 선수였다.

 

 

 

 

 

  이종범 선수는 옛 스승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이글스 코칭스테프로 합류하게 됐다. 작전코치였지만 그래도 그가 한화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한화이글스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2012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선수들이 있다.

 

  아주 오래 전의 한대화가 그랬고 장성호가 그랬다.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고 타이거즈를 상대하는 그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최근엔 이용규가 그런 경우이다.

 

   이용규는 LG에서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타이거즈 팬들에겐 프랜차이즈스타나 다름없었다. 매년 슬럼프를 겪었지만 충분히 제 몫을 해주었고 특유의 근성을 보여주며 타이거즈의 투혼의 대명사가 되어주었다그래서 많은 팬들은 그가 타이거즈에 남길 바랐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그가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상상하기 싫었다.

 

  그런데 그가 팀을 떠났다.

 

  그가 언론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전했을 때만 해도 팬들은 구단 측에서 분명 그를 서운하게 대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일종의 언론플레이를 한 셈이었고 이미 한화이글스 행이 약속돼 있었다.(라는 게 확실한 정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14년엔 부상 때문에 제대로 경기에 뛸 수 없었다. 그리고 수술을 받고 재활을 했다. 2015, 그는 성공적으로 재활을 끝냈고 완벽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화이글스가 시즌 내내 중위권에서 버틴 데는 이용규의 힘이 컸다.

 

  2015822, 그는 비록 5타수 무안타에 그쳤지만 에이스 양현종에게 열일곱 개의 공을 던지게 하는 등 끈질긴 집념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문제적 장면은 6회말 한화이글스 수비에서 발생했다. 21루였고 브렛필이 그 날 경기 로저스의 79구째를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내는 듯했다. 그러나 이용규가 빠른 발로 달려와 그 타구를 잡아냈고 3루심도 노바운드 캐치를 선언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1루 주자였던 박준태는 3루에 멈춰 있었고 타자 주자 브렛필은 1루에 머물러 있었다. 이용규는 마운드까지 달려와 노바운드 캐치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김기태 감독은 곧바로 비디오판독을 요청했다. 김성근 감독은 6회 공격이 종료된 것으로 판단, 선수들을 덕아웃으로 불러들였다. 이 장면은 좀 아쉬운 장면이었다. 비디오판독 신청이 들어간 상태에서 수비 팀이 (어떤 결과를 확신할 수 있다고 해도) 그라운드에서 철수한 것은 상대 팀은 물론이고 홈팀 팬들에게도 실례를 범한 경우이다.

비디오판독 결과 바운드가 된 직후에 이용규가 공을 잡았다는 사인이 나왔고 이용규의 허탈한 표정이 중계카메라에 잡혔다. 충분히 아쉬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용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전혀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졌다. 외야석에 있던 한 관중이 이용규를 향해 얼음물병을 던진 것이다. 일단 이러한 행동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그러나 이용규의 대응이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그 관중과 1:1로 대응을 하려는 듯이 관중석을 돌아보며 인상을 구기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욕설을 내뱉는 입모양이 그대로 잡혀 팬으로서 참 민망한 상황을 보고 만 것이다.

 

 

  첼시의 심장을 품은 채 맨시티로 이적한 램파드는 2014922, 첼시를 만나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리고도 별다른 세레모니를 하지 않는다. 그건 첼시와 그동안 자신을 응원해준 첼시 팬들에 대한 예의이자, 오랜 기간 첼시에 몸담았던 자신에 대한 예의이다. 해외축구 문화와 KBO리그 문화를 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어려운 문제이지만, 적어도 이용규가 9년 동안 몸담았던 팀과, 자신을 응원해준 팬들, 그리고 과거 타이거즈 소속이었던 자기자신에 대한 예의를 조금만 갖췄더라면 적어도 그런 제스처는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건 지금의 이용규에겐 타이거즈 유니폼보다는 이글스의 유니폼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양현종이 타이거즈의 에이스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에이스는 팀의 상징이자, 팀의 자존심이다. 8월 4일 타이거즈의 상징이자, 자존심인 양현종이 무너졌다. 이 경기에서만 네 개의 홈런을 허용했다. 이 경기 전까지의 피홈런 개수는 아홉 개였으니 두 달 동안의 허용치를 단 하루만에 허용한 셈이다.

 

  지난 시즌을 회고해 보면 양현종은 팀이 연패 중인 상황에 많이 등판했다. 그만큼 타이거즈의 연패는 많았고, 양현종이 고군분투하는 게 타이거즈가 보내는 시즌의 일반적 풍경이었다. 그가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마음이 애잔해졌다. 팀 상황은 갈수록 안 좋아지는데, 팀을 향한 바람을 모두 그에게만 지운 것 같아서였다.

 

 

  난 양현종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무산되었을 때 내심 기뻤다.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팬으로서 기쁜 일이지만, 난 그가 타이거즈 에이스로서 다시 한번 2009년의 환희와 영광을 팬들에게 선사해주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타이거즈가 리그를 좌지우지하는 풍경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기아 프런트는 김기태 감독을 선임하면서 당장의 성적보다는 미래를 위한 리빌딩 작업에 착수해줄 것을 부탁했다. 

  과연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등장했다. 시범경기 때만 볼 수 있던 백용환이 정규 시즌 중에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고, 공격형 포수로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상훈과 차일목의 그늘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이성우도 꾸준히 마스크를 썼다. 그리고 이홍구도 눈에 띄게 성장 중이다. 비록 이성우는 부상 이후 2군에 머물고 있지만 엔트리가 확대되는 시점 전후로 다시 1군에 오를 것이다. 믿을 만한 포수 자원이 없어 고민이 많던 타이거즈가 포수 왕국을 꿈꾸고 있다고 해도 비웃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외야의 김호령과 내야의 박찬호 등도 1군에 더 어울리는 선수가 되어가고 있다. 어린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보여준 집념은 팀의 분위기를 바꾸거나 팀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적이 많았다. 이밖에도 황대인이나 윤완주도 1군에서 꾸준히 기회를 받을 것이다. 

  가장 관심이 많은 자원은 역시 투수다. 고졸 신인 박정수가 올스타브레이크 전후로 팬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고, 시즌 초반 지독한 성장통을 겪은 문경찬과 임기준이 1, 2군을 오가며 절치부심하고 있다. 

 

  리빌딩은 신예들로만 팀을 구성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은 웬만한 야구 팬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김기태 감독의 조직 능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기태 감독은 베테랑급 선수들의 가치를 인정해주며 그들이 스스로 더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타이거즈가 밀리는 전력으로도 지금까지 5할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김기태 감독의 베테랑들을 향한 믿음과 그 믿음에 대한 그들의 응답 덕분이다. 

 

  

  다시 양현종이다. 

 

  6연승 이후 마운드에 올랐고 양현종은 5이닝 8실점을 했다. 독감을 안고 공을 던진 투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어제의 경기가 팀과 양현종에게 큰 리스크가 될 수는 없다. 다시금 에이스 양현종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고, 어제의 양현종은 또 금세 잊을 것이다. 어느 팀의 에이스라고 해도 완성된 에이스는 없다. 에이스도 성장해야 하는 선수들 중의 한 명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에이스는 스스로 성장의 동력을 만들어 스스로 성장한다. 어제의 양현종은 오는 8월 9일 새로운 양현종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여전히 타이거즈는 만들어지고 있다. 팬들이 더 열성으로 응원을 보내야 하는 이유이다. 

 

    

 

 

  눈앞에 김상현이 있었다. 그가 우리 팀에서 SK로 넘어갔을 때 충격이 적지 않았다. 상대가 SK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던 송은범이라는 건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었다. 프로의 세계이고, 프로는 그 세계의 룰대로 적을 옮기는 게 마땅한 일이지만 그를 오랫동안 응원해온 팬의 입장에서는 이별이 쉽지 않았다. 그것은 프로인 그에게도 비슷했던 것 같다. 문학경기장을 찾은 한 타이거즈 팬이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자, 기아로 해줄까요, SK로 해줄까요, 라고 물었다던 일화는 SK 팬들이 공노할 일이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내친 구단과 감독에 서운한 마음이 컸을 텐데도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는 타이거즈의 김상현이란 이름으로 인사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읽혀서 마음이 아팠다.

  그가 다시 KT에 특별지명되어 팀을 옮겼을 때, 조금이나마 미안함을 덜 수 있었다. 마침 KT의 사령탑이 2009년 자신의 전성기를 옆에서 지켜보고 이끌어주었던 조범현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같은 유니폼을 입게 된 장성호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KT 위즈를 응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김상현의 왼쪽, 그라운드의 최후방에는 이대형이 서 있었다. 타이거즈에서 딱 한 시즌만 있었을 뿐인데, 난 그를 김상현만큼이나 쉽게 잊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래서 그런지 중계화면에 잡힌 이대형의 표정은 늘 어두운 것 같았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말 야구가 재미없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대형을 잃고 시즌을 맞이하고 팀은 개막 6연승을 달렸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대형이 전 시즌 유일한 3할 타자여서가 아니었다. (여기서부터는 무논리다.) 그냥 난 이대형이 좋았다. 그가 LG에 있을 때부터 고향팀에 와서 뛰어줬으면 하고 바란 적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거짓말처럼 타이거즈에 오게 되었다. 이용규의 대체자원이었지만 이용규를 능가하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2014 시즌도 팀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그래도 야구 볼 맛이 났던 건 이대형이 있어서이다. 물론 주루사도 많이 당하고 도루 실패도 많았다. 하지만 나같은 팬은 프로가 아니어서 어떤 수치에 의존해서 선수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20인에 들지 못하고 KT로 가게 되었다. KT에 가면서 그가 남긴 코멘트는 팀에 필요한 선수가 되겠다.”였다. 그는 KT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되어 있었다.

 

 

  초반에 분위기가 타이거즈 쪽으로 기울면서 난 경기보다는 김상현과 이대형, 둘의 움직임에 더 신경이 쓰였다. 승패와는 상관없이 둘 다 잘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둘을 지켜보았다.     

  이대형은 6회에 볼넷을 얻어 출루했고, 8회에는 안타를 치기도 했다.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러나 김상현은 한 번도 출루하지 못했다. 다만 경기 중반 외야에 있던 관중들이 김상현의 이름을 연호했는데, 그가 들고 있던 공을 던져주었다. 또 한번 가슴이 찡했다.

  KT는 그래도 잘하고 있다. 2013 시즌 NC만큼은 아니지만 적극적인 트레이드와 외국인 선수 영입을 통해 상대 팀이 만만히 볼 수 없는 팀이 되었다. 이번 주말에 타이거즈를 만나기 전에도 NC에 위닝시리즈를 거두지 않았나. KT는 더 강해질 것이다.

  KT를 응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이거즈가 패망하길 바라진 않는다. 팬이라는 게 그렇다. 내일부터 내가 기아 야구 보면 사람도 아니다, 라고 말하지만 당장 내일이면 멀쩡한 사람의 모습으로 TV 앞에 앉아 있다. 실제로 팀을 바꾸는 사람도 여럿 보긴 했지만, 대다수의 팬들은 팀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팬들도 어느 정도는 프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 김상현은 올 시즌이 끝나면 FA가 된다. 현실성은 심히 떨어지지만 난 그가 FA를 통해 다시 타이거즈에 돌아오면 좋겠다. 논리는 없다. 그냥이다. 그냥, 그가 좋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이대형도!

 

20150315 윤석민

야구2015. 3. 16. 01:41

 

  윤석민이 돌아왔다. 금의환향은 아니다. 그는 분명 실패했다. 스포츠 일간지들은 윤석민의 한국 복귀 소식을 앞다퉈 쏟아냈다. 윤석민과 볼티모어, 그리고 기아타이거즈 간의 손익 계산까지 따져보는 기사문도 있었다. 윤석민의 가세가 타이거즈 팀 전체에 미칠(이미 미치고 있는) 영향을 분석한 기사문까지 모두 훑어보았다. 설렜다. 기사를 읽는 게 재미있었다. 정규리그가 개막하기도 전인 3, 오키니와에서 연일 열리고 있는 연습경기에서 타이거즈가 전패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는 뉴스보다 더 참담하게 들려오던 그 때, 윤석민의 복귀는 그 사실만으로 날 들뜨게 했다.

 

  진짜다. 윤석민이 돌아와 버렸다.

 

 ‘돌아와 버렸다는 하나의 완료된 사건이고, 그래서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체념이나 절망으로 이어지는 사태가 아니다. 윤석민이 돌아와 버렸으므로 타이거즈는 더이상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팀이 돼버렸다. 물론 윤석민이 있었던 2013년도 정규리그 8위에 그쳤다. 하지만 2013년의 윤석민은 완전한 몸으로, 그리고 안정된 보직으로 공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았고, 그가 있었으므로 2013년 시즌을 꾸역꾸역 꾸려갈 수 있었지만, 그가 없었다 한들 2013년의 레이스가 불가능했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진짜 윤석민이 돌아와 버렸다.

 

  2014년 볼티모어에 적을 두고 있던 윤석민이 타이거즈를 떠나 있던 그 해의 성적에 대한 빚을 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난 그가 타이거즈를 떠나 있는 동안에도 그를 그리워했다. 야구는 전년도의 성적으로 다음 시즌의 성적을 예상하고 기대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객관적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관람하는 팀의 경우에 가능한 일이다. 나의 팀에겐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타이거즈가 비록 2013년에 성적이 바닥을 쳤다 해도 2014년에도 비슷한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예상하는 은 아무도 없다. (뼛속까지 타이거즈 팬이라면서 타이거즈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진짜 팬은 아니다.) 전년도 성적이 좋지 않았어도 다음 시즌에는 전년도보다는 더 나은 성적을 거두길 기대하는 게 진짜 팬의 마음이다. 그래서 2014년의 타이거즈를 응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2014년 시즌을 지켜보면서 윤석민의 가세를 가정하고, 양현종만으로 견고하게 구축되지 않는 타이거즈의 선발진을 상상으로 꾸려보기도 했던 것이다. 나 혼자만의 상상이 아니라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모두는 그런 상상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윤석민이 굳이 져야 할 빚이 있다면 2014 시즌, 팬들이 가장 강력하게 원하고 기다렸던 자신의 귀환을 1이나 늦춰 이뤄준 것에 대한 빚이다. 그 빚의 탕감은 당연히 2015 시즌의 성공이다.

 

  진짜 윤석민이 돌아와 버렸다. 정확히 527일만이다.

 

  그는 315LG와의 시범경기 2차전에서 안익훈, 최승준, 김용의를 상대했다. 18구를 던졌고, 그 중 직구 최고 구속은 146km였다. 노포크에서 던질 때 최고 구속이 130km 중후반이었던 걸 고려하면, 그의 몸은 작년보다 훨씬 더 좋아진 상태라는 뜻이다.

 

  그와 함께,

 

  진짜 타이거즈가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