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상략)

 

…진흙에 범벅되는 하얀 인조 깃털

그 난처한 아름다움.

 

아니면

야간 비행 실수로

낡은 고가도로 교각 끝에

불시착한 천사

 

가까스로 매달린 채

엉덩이를 내보이며

날개는 추스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면

비둘기 똥 가득한

중세의 첨탑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측은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망연자실.

 

                                                      - 허연, 「내가 원하는 천사」 부분.

 

 

  타일러 스캑스가 천사였다면 그의 날개는 진흙투성이였을 것이다. 꾸준히 날갯짓을 해왔지만 어디도 맘껏 날아보지 못한. 그 ‘난처한 아름다움’

 

 엔젤스에 지명되었으나 엔젤스의 전략적 선택에 의해 곧바로 애리조나로 보내진 그는 3년 후 다시 엔젤스에 돌아왔고, 지난 시즌에는 선발투수로서 준수한 활약을 펼친다. 올 시즌에도 로테이션에 포함되어 팀의 실질적인 에이스로 부상한다.

 

 그러나 2019년 7월 2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6월 30일, 오클랜드 전이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만다. 이제 완전한 날갯짓으로 진짜 아름다움에 근접해가던 그는 끝내 추락하고 만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에인절스 스타디움은 그저 ‘망연자실’

 

* 예정돼 있던 LA에인절스와 텍사스레인저스의 경기는 취소되었다. 타일러 스캑스가 천사가 되었다면 그는 에인절스 스타디움의 그라운드를 측은하게 내려다보고, 먼 하늘을 향해 날아갔을 것이다. 그가 더 이상 날개를 추스르지 않아도 되는 천사가 되길 기도한다.

 

이별의 그늘(윤상)

노래2019. 2. 18. 13:32

 

 

문득 돌아보면,

 돌아보면 있다.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내가 있다. 다시는 임용고시 따위는 보지 않을 거라고 누간가의 어깨를 붙잡고 울던 내가 있다. 그 때 그는 내게 그랬다. 이렇게 울 거면 다시 해. 그러나 나는 그 뒤로 임용고시를 치르지 않았다.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돌아보면 아직도 나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있다. 몇 번이고 다짐하고 그 다짐을 스스로 허무는 나를 돌아보는 내가 있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럴 거면 다시 써. 그러나 나는 어떤 시도 쉽게 완성하지 못했다. 

 몇 년 전 어렵게 시를 완성해온 한 아이에게 이렇게 쓸 거면 쓰지 마,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주아주 나중에 그 아이가 한 시간 가까이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늦게서야 돌아보니 아직도 울고 있는 그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천천히 내게 다가와 왜 아직 울고 있는 거냐고 되묻는다. 아, 울고 있는 건 나였구나. 

 

 문득 돌아보면 같은 자리지만,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번지다 만 그늘처럼. 그 그늘에서 시간은 고이고 늘 같은 자리에 서있으면서 난 아주 먼 길을 떠나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으며 또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면 아버지가 서 있다. 아버지는 돌아보는 일에도 서툴다. 한 손은 주머니에 찌른 채지만 나머지 한 손은 만질 것도, 따로 둘 데도 없어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아버지는 주로 마당가에 서 있다. 아버지는 내가 오는 기척을 느끼지만 바로 돌아보지는 않는다. 마치 다른 중요한 볼 일이 있는 것처럼, 마침 삭정이처럼 비어져 나온 손으로 허방을 더듬는다. 아주 먼 길을 떠나온 사람처럼,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만날 수 없었지, 한번 어긋난 후,

 

 어떤 아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만나게 해드릴게요. 한번쯤 만나보면 좋을 것 같은 아이들은 여럿 있었지만, 나만의 의지만으로, 나 혼자 시간과 노력을 들여 움직여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해서 만날 필요가 있을까. 물론 그 아이는 내게 선의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 아이가 나와 만나게 해줄 수 있는 또다른 무리들은 나와 무척 다정했던 사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고, 거기서 더 시간이 지나, 마치 이미 어긋나버린 사이가 돼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다시 만나기 위해선 누군가 지난 일에 대해 사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다만 시간이 흐른 것뿐인데도 말이다.

 

 나의 기억에서만 살아 있는 먼 그대,

 

 뇌에는 감정과 객관적 사실을 다루는 뇌가 각각 따로 있다고 한다. 전자의 주체는 해마와 편도체이고 후자의 주체는 전두전야이다. 이 두 개의 뇌는 상황에 따라서 주종관계가 뒤바뀌는데, 해마와 편도체의 작용이 활발해지면 사람은 객관적 사실을 외면한 채 감정적으로 변하게 되고, 전두전야의 작용이 활발해지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이성적 평가를 통해 얼마든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나의 기억에서만 살아 있는 먼 그대’가 있다고 하자. ‘나’는 얼핏 해마와 편도체의 작용에 압도당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별이 슬프고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사실 전두전야가 주도적으로 작동하여 자신의 기억 속에서 ‘객관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슬픔이나 안타까움의 정서가 깔려 있지만, ‘나’는 그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되도록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더 객관적으로 위치시켜 ‘먼 그대’라고 인식하고 있다. 


 더 오래 살아 있길 바란다. 더 멀리 떨어진 채로. 영영 객관적인 기억 속에서.   

 

 난 끝내 익숙해지겠지, 그저 쉽게 잊고 사는걸

 

 그러나 끝내는 익숙해진다. 먼 산까지 아지랑이 기어오르는 봄날부터, 눈의 결정들이 허공을 가득 메우는 겨울날까지, 시간이 시간을 부르고, 시간이 시간을 잊고, 다시 시간이 시간으로 되살아나는 동안, 나도 서성거리다가 떠난 사람이 누구였는지 잊고, 몰래 울고 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 시를 잊고, 나의 기억에서만 살아 있던 사람을 잊는다. 아버지를 잊고,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까지 잊는다. 내가 아주 오래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듯이, 우왕좌왕, 허둥지둥, 아등바등했던 모든 몸짓을 잊는다.  
  


  또 함께 나눈 모든 것도 그만큼의 허전함일 뿐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떤 만남을 준비할까

 하지만 기억해줘,

 지난 얘기와 이별 후에 비로소 눈뜬 나의 사랑을

 
 

 나는 안개를 이해하지 못했다, 라고 시작하는 시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사는 시골마을에는 아침안개가 늘 자욱했다. 안개 속을 눈이 먼 것처럼 더듬더듬 걸어가곤 했다. 느릿느릿. ‘더듬더듬’과 ‘느릿느릿’은 그 때의 내 속도였다. 짙은 안개가 걷히고 나는 눈을 떴다. 안개 바깥으로 나오게 된 것을 안개를 이해한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 허둥지둥했다. 아등바등 사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안개는 아직도 등 뒤에서 일렁였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돌아보면, 내가 아직 같은 자리에 있을까봐 두려웠다. 그 아이가 울고 있고, 아버지가 아직 서성거리고 있고, 아무도 용서하지 못한 채로,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한 채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일까봐 돌아볼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있었고, 눈앞에 분명 누군가 있었는데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가 내게 천천히 다가와 내 얼굴을 만지며 이렇게 말한다.

 

 왜 아직도 울고 있느냐고.

 

 나는 아무하고도 헤어지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8월 마지막 경기에서 롯데자이언츠에 8:6으로 졌습니다. 스코어상으로는 나쁘지 않은 패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경기 운용을 들여다보면 암울합니다.

 

  양현종 선수가 1회 5실점을 했지만 2회부터는 안정을 찾아 에이스다운 투구 내용을 보여줍니다. 타석의 선수들도 꾸준히 점수를 보태 4회, 5:4를 만듭니다. 롯데자이언츠도 쉽게 물러날 경기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5이닝이나 남은 상황에서 1점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7회였습니다. 7회말, 김동한을 대신해 타석에 들어선 채태인 선수가 안타를 치고 나갑니다. 이미 1이닝을 던진 김윤동이었지만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지켜볼 만했습니다. 채태인은 대주자 나경민으로 교체되고 타석에 선 안중열에게 보내기 번트 사인이 떨어집니다. 1사 2루. 그 다음 타석에는 전준우 선수. 볼이 연달아 들어갑니다. 3구째 스트라이크를 꽂아넣었지만 김윤동 선수의 구위는 눈에 띄게 저하돼 있었습니다. 전주우 선수가 볼넷으로 출루하여 1사 1, 2루가 됩니다.

 

 ㉠이대진 코치가 투수 교체를 해야 되겠다고 김기태 감독에게 의견을 제시하지만 김기태 감독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모습이 중계화면에 잡힙니다.

 

 ㉡이대진 코치가 투수 교체를 하기 위해 마운드에 나가려는 순간 김기태 감독이 그를 붙잡습니다. 설명은 없습니다. 그 모습도 중계회면에 잡힙니다.

 

  투수교체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손아섭은 김윤동의 초구를 통타해 우측담장을 넘겨버립니다. 쓰리런홈런. 스코어는 8:4.

 

  ㉠과 ㉡의 선후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중계방송을 복기해보지 않아 자신은 없습니다만 아마도, 전준우 타석 전에 ㉠이 이뤄졌고 손아섭 타석 전에 ㉡이 이뤄졌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사건의 선후관계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김기태 감독이 이대진 투수코치의 의견을 묵살했다는 것입니다. 투수 교체 타이밍을 머리를 맞대고 논하다가 투수 교체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냥 김기태 감독이 독단적으로 투수 교체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이후 롯데자이언츠는 단 한 점도 추가하지 못했고, 기아타이거즈는 최형우와 나지완 선수가 홈런을 터트려 8:6까지 따라갔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졌지만 잘 싸운 경기’도 아니었습니다. ‘잘못 싸워서 진’ 그런 경기였습니다.

 

  결과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대진 코치는 분명 투수를 바꾸려고 했고, 경기를 지켜보던 이순철 해설위원도 손아섭 타석에서 투수를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커뮤니티에서도 투수를 바꾸는 게 좋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김기태 감독은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경기의 패배를 확정지었죠. 이 경기로 기아타이거즈는 8위가 되고 롯데자이언츠는 7위로 올라섰습니다.

 

  김기태 감독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이 있습니다.

  김기태 감독은 선수들, 코칭스태프와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김기태 감독은 선수의 입장과 상황을 충분히 헤아려준다. 특히 베테랑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 소통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소통을 잘하는 감독이라면 임창용 선수와 정성훈 선수를 그 때 2군에 내려보내지 않았겠죠. 기아타이거즈에 뼈를 묻겠다며 돌아온 임창용 선수를 선발로 마운드 위에 세워 무력하고 초라하게 만들지는 않았겠죠. 당장 어제 경기에서도 이대진 코치가 제시하는 의견을 받아들였겠죠.

  선수들의 입장과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임창용 선수가 선발로 나서겠다고 한 건 정말 자신이 선발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는데, 김기태 감독은 ‘임창용 선수가 하고 싶다고 해서’ 선발로 돌렸다고 했죠.

 

  기사 : 김기태 감독의 ‘임창용 선발 전환 이유’ “본인이 원해서”

  http://sports.hankooki.com/lpage/baseball/201807/sp2018071916185757360.htm

 

  선수가 하고 싶다고 하면 다 시켜주는 게 감독입니까? 비겁합니다. 당신은 진짜 책임질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책임진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겁니까? 당신이 감독직에서 물러나면 어제 경기의 상실감이 회복될 거라 믿습니까? 8위로 곤두박질친 팀의 순위가 이해되리라고 믿는 겁니까? 당신의 사퇴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오히려 당신에게 도피의 수단이 되겠지요.

 

  일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책임을 진다는 말처럼 가장 무책임한 말도 없다고. 감독으로서 책임을 진다는 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제의 경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다시 7회말로 가봅시다. 7회말 1사 1, 2루입니다. 타석에는 롯데자이언츠의 강타자 손아섭 선수입니다. 이때 이대진 코치가 당신에게 뭔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감독으로서 경기를 책임진다는 것은 감독으로서 당신이 해야 할 일들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입니다. 코칭스태프는 당신의 1인 동아리가 아닙니다. 수석코치가 있고 투수코치가 있습니다. 배터리코치도 있고요. 타격코치도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경기의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면 좋을지 의견을 모으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러고도 팀이 패배하면 그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경기 결과를 수용하고 자신의 과오가 있었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감독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말끝마다 감독이 책임지겠다는 말을 하는 게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로는 당신은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져야 할 책임의 일부를 지금 임창용 선수가 지고 있는 것입니다. 임창용 선수는 투수조 운용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소통을 중시하는 감독이라면 투수조 최고참의 의견을 귀담아 들었겠죠. 그런데 당신은 이를 항명으로 받아들이고 임창용에게 2군행을 통보했습니다. 웨이버공시까지 시키려고 했죠.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

 

 임창용 선수는 1군에 다시 올라와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게 됩니다. 마땅한 선발 자원이 없는 상황에서 임창용 선수가 자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선발투수를 하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임창용 선수는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의도한 게 아니었지만 자신이 2군에 가 있는 동안 투수진은 더 사정이 안 좋아졌으니까요. 후배들에게 지워질 부담을 자신이 지기로 한 것이지요. 김기태 감독은 임창용 선수에게 다른 의미의 벌투를 내린 것이고, 임창용 선수는 감독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임창용 선수가 왜,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책임을 지고 있는 중입니다.